티스토리 뷰

아버지가 대장장이였으니 별수 없이 그 일을 이어받아 모루를 짊어지고 해안가 마을 장터를 떠돌았다는, 남쪽 어촌 마지막 대장장이의 얘기를 적은 책을 보면서 엉뚱하게 총을 숨겨놓은 관을 끌고 사막을 떠돌아다니는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쇳덩어리를 끌고 장이 서는 곳을 찾아다니는 한 사내의 모습은 비운의 총잡이처럼 비장할 것만 같았다. 그가 장터 한구석에 화로를 지핀 뒤 잘 달궈진 쇠를 모루에 올려놓고 내리칠 적마다 울려 퍼져나갔을 쇳소리, 그 소리는 아득하게 멀어서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어릴 적에 철가면 아저씨가 온종일 용접 기계를 들고 불꽃을 튀겨가면서 잇고, 잘라대는 철공소 앞에서 살았던 나로서는 대장장이도 화덕도 드라마 사극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려니 했다. 그런데 지금도 곳곳에 대장간이 남아 있었다.

대체 무쇠를 어떻게 달궈야 칼이 되고, 낫이 되고, 호미가 되는지 보고 싶어 찾아간 서울 변두리 대장간에는 정말 화덕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대장간 앞 진열대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칼과 반들반들 윤이 나는 호미와 도끼가 놓여 있었다. 이걸 다 만들어내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대장장이는 손가락으로 가리킨 칼을 보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잘 봐요. 모양이 다 똑같잖아요. 공장에서 만든 거지. 내가 만들어서는 수지가 안 맞아요.” 대장간을 찾아와 이 칼도 저 도끼도 네가 만든 것이냐 묻는 사람은 있어도 정작 오랜 시간 대장장이가 담금질하고 메질한 것을 사가는 이는 드물다고 했다.

“공장에서 뽑아내는 것들은 싸니까, 싼 게 비지떡이라고 금방 이가 나가도 버리고 또 사면 되니까 비싼 수제품을 사는 사람이 드물지요.”

그런데도 그가 화로를 꺼트리지 않는 것은 자신의 솜씨를 믿고 집 꾸밀 때 쓰일 장식품을 부탁하는 이들 덕분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주문받은 것만 만들어냈는데, 요즘은 자신이 직접 도안을 한 작품도 있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정교하고 아름다웠다. 수십 년 동안 칼날을, 도끼날을 벼른 이의 솜씨가 오죽할까. 요즘도 버스를 타고 그 대장간 앞을 지나면서 생각한다. 저 대장간 화로 꺼지기 전에 날 선 칼 하나 주문해야 할 텐데….

김해원 | 동화작가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