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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중세 고도(古道)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연애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여행자들은 베로나역에 내리면 도심의 아레나(원형극장)를 따라 에르베 광장 근처 줄리엣의 집으로 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고백했던 이 집 발코니를 소재로 몇 해 전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줄리엣의 발코니’라 불리는 이곳 벽에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메모들이 도배하다시피 빼곡히 붙어 있고, 매일 사랑에 빠진 이들의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애틋한 첫사랑의 고백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이다. 설레는 첫사랑이든, 쓰라린 실연이든 베로나는 사랑의 성지(聖地). 50년 전 불발된 첫사랑의 약속을 찾아 초로의 여인이 나타나기도 하고, 약혼 여행을 왔다가 헤어지고 이곳에서 미지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며 머무는 작가 지망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베로나에서 인상적인 곳은 단연 줄리엣의 집이지만, 그보다 은밀하게 내 관심을 끈 곳은 줄리엣의 묘와 아레나 옆 고서점이었다. 줄리엣의 집을 방문하고, 반대편 아레나 길을 따라 기차역이 있는 남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다 보면 사이프러스나무로 에워싼 저택에 이르게 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식을 치른 수도원이다. 이 뜰 한쪽 지하에 줄리엣의 묘가 있다. 묘는 석개(石蓋)가 없는 석관묘이다. 지하는 석굴처럼 서늘하고, 한가운데 관 모양으로 자리잡은 붉은 석묘에는 속이 텅 빈 채,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을 뜻하는 흰 백합 꽃다발이 놓여 있다. 입구에 줄리엣의 묘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이곳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추정지일 뿐이다.

베로나에서 두 번 찾아간 곳은 줄리엣의 발코니도 그녀의 묘도 아닌 아레나 옆 서점이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서 역으로 가다가, 돌연 다시 아레나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고서점은 입구에서부터 허물어질 듯 쌓아놓은 책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내가 구한 책은 이 지역 출신 화가들의 화집과 서점 건너편 식당 벽에 모사화로 재현해놓은 미국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이었다.

베로나에서 돌아온 지 몇 해가 흘렀다. 올해는 어디로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긴 여름날 오후, 아레나 옆 헌책방에서 구해온 화집을 펼쳐본다.

내일은 보수동 서점 골목으로 순례를 떠나야겠다. 육이오 동란기 잠시 둥지를 틀었던 화가들의 옛 부산 풍경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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