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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시즌이다. 이번 학기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과 소설의 다양한 형상을 점검하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 편의 짧은 소설로 창작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어문학과 학부 전공 수업이지만 한국어문학, 문예창작학, 국문학, 교육학, 철학생명윤리학, 사학, 경영학, 국제관광학까지 다채로운 전공 학생 50명이 참여했다.

이론과 창작실습을 통합한 새로운 형태의 수업을 개설하며, 처음엔 이 많은 인원으로 소설 창작까지 도모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감행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얼굴 생김새가 있고, 눈빛이 있고, 음색이 있고, 화법이 있듯, 각자 자기만의 문장과 문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이 처음 소설이라는 것을 쓰려고 할 때 봉착하는 것은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이야기)이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는 깨달음이다. 이때 내가 제시하는 것이 ‘원체험’이다.

원체험이란 전쟁이나 보릿고개의 극빈, 육친의 죽음, 테러 등과 같은, 자신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닌, 외부에서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다. 대부분 비극적이고, 말도 안되는 ‘부조리 상황’으로 트라우마를 남긴다.

함정임 동아대교수

나의 경우, 1980년대 대학 시절, 민주화의 상징인 집단의 광장과 거리, 그리고 개인의 밀실인 도서관과 소극장을 오가며 겪었던 공포와 죄의식이 있고, 그보다 더 심층적인 원체험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신산스러운 아픔이 있다.

내가 원체험을 꺼내놓자, 읽고 소비하기에만 치중했던 학생들이 백지 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종강을 앞두고 모두 각자 한 편씩 소설을 완성했다. 원체험 쓰기는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받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행위와 같다.

소설은 자기 안에 억눌린 자아에게 귀를 기울이고, 숨을 터주는 것부터 출발한다. 차마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드러내놓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소설쓰기의 본질이 구원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원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나의 원체험 쓰기로부터 세상의 아픔에 가닿을 수 있다. 소설이란, 때로 연민과 애도,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무고한 생명들이 무자비하게 희생당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온전히 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 위해, 이청준의 <자서전을 씁시다>라는 소설 제목처럼, 이 여름 소설 한 편씩 써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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