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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미국에 연구년으로 체류하던 2014년, 박진 외교부 장관이 당시 우드로 윌슨 센터에 리서치 펠로로 머무르고 있었다. 당시 박 장관의 소신 중의 하나가 돌고래론이었다. 이전까지 한국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에 비교되곤 했지만, 이젠 더 이상 새우가 아니고 미·중 사이에서 당당한 외교를 주도하는 돌고래가 되었다는 담론이었다. 당시는 또한 외교부나 한국의 학자들이 통일대박론을 열심히 홍보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대박’ 즉 보난자(Bonanza)를 역설하고 있을 때이기도 했다. 박 장관은 보난자라는 표현보다는 굳이 ‘위대한 자산’(Great Fortune)이라는 번역을 고집했다. 외교란 격조 있는 언어를 통해 국격을 높여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통일이라는 과업을 노다지를 연상케 하는 보난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논지였다. 그런 그의 품격에 워싱턴의 많은 전문가들이 엄지척을 보내주곤 했던 기억이 있다.

현 정부 외교 노선의 요체는 글로벌 중추국가론이다. 사실상 돌고래론의 연장선에서 나온 정책이다. 연이은 K시리즈의 성공으로 한국 외교의 위상이 과거 어느 때보다 글로벌화되었음을 감안하면, 글로벌 중추국가론은 적시에 제기된 중요한 노선이다. 다만 글로벌 중추국가로서 한국 외교가 자리잡기 위해서는 몇가지 풀어야 할 전제가 있다.

먼저 글로벌이라는 서사는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이 아시아와 같은 지역적 맥락을 간과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MB 정부 당시 우리 외교 전략인 ‘세계로’(Going Global) 담론은 비교 대상이다. ‘세계로’ 전략은 자원외교와 같은 성과를 낳긴 했지만 차이나 패싱에 따른 뜻밖의 역풍을 맞았다. 보수 정권이었던 박근혜 정부가 다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나 동북아평화협력구상 그리고 통일대박론과 같이 유라시아, 동아시아, 한반도라는 지역으로 회귀했던 이유였다.

글로벌 중추국가론 역시 지역전략과의 관계가 문제시된다. 최근 신남방정책이 사라진 것 아니냐라는 인상 비평이 제기된다. 글로벌 중추국가가 글로벌, 지역, 한반도라는 3단계 프로세스를 안고 가기를 바라는 염원이다. 그러나 아직은 큰 걱정을 할 때는 아닌 듯하다. 야인 시절 동남아 연구에 매진했던 박 장관에게서 글로벌 중추국가의 균형감을 기대해볼 만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현 상황에서 한국 외교의 첫째 가는 과제는 경제안보다. 미·중 대결 과정에서 굳어지고 있는 디커플링과 그에 따른 두 개의 공급망 체제 즉 양망체제의 등장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경제안보전략은 한국 외교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하고 있다. 경제안보전략 역시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세와 우리 산업이 글로벌망에 필수 불가결한 부분이 되게 하는 ‘전략적 불가결성’인 공세 사이의 우선순위가 있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양자 간의 균형을 맞추는 전략을 실행하고 있다는데, 우리의 경제안보전략은 어떠한가? 경제안보전략과 글로벌 중추국가론은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 것일까? 최근에 제기된 담대한 구상 역시 그 화려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경제안보전략의 후순위임에는 분명하다. 국민들은 여러 전략 사이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이번 조 바이든 행정부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사태나 낸시 펠로시 의장 해프닝은 한국 외교사에서는 뼈아픈 기억이다. 한·미 동맹을 향한 전략적 명료성을 강조해 온 일부 논객들조차 최근의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세 번째 과제는 외교 사령탑의 체계에 관한 논의를 요구한다. 한때 외교부는 다자외교, 안보실은 4강외교라는 역할분담이 우리 외교의 비공식 매뉴얼이 된 시절이 있었다. 다자주의의 상징이었던 강경화 장관 시절이 그러했다. 외교부는 불만이 많았겠지만 당시 청와대가 주도한 4강외교는 세기의 북·미회담을 만들어내는 성과를 낳았었다. 한편 정의용 장관 시절 외교부는 다시 다자외교에 더해 4강외교까지 아우르는 공식적 최고 사령탑으로 돌아왔다. 정의용 안보실장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라는 개인의 지위 변동과 능력에 따른 결과라는 아이러니는 있었지만, 어쨌든 정책결정과정으로서 두 개의 패턴은 연구해볼 만한 방식이다.

한국 외교의 위상이 커진 상황에서 외교부가 다자외교를, 대통령실이 4강외교를 맡는 강경화 방식도 신선하지만, 아직 외교에 높은 식견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 모델은 시기상조일 수 있다. 결국 외교부의 지위와 능력이 글로벌 중추국가론의 성패에 결정적 요인이 될 듯하다. 박진 장관 얘기로 이 글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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