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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인천 서구의 미혼모시설에서 2년여 동안 강의했다. 강의 중 이따금 책 좀 읽으라는 잔소리를 했더니 읽을 책이 없다는 말이 돌아왔다. 궁리 끝에 ‘페친’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적게는 열아홉살, 많아야 스물다섯살밖에 안된 앳된 얼굴의 미혼모와 그들의 아기들이 읽을 책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불과 열흘 만에 무려 5000여권의 책이 답지했다. 원장 수녀님과 사회복지사는 깜짝 놀랐고, 그 놀람은 곧 한숨으로 이어졌다. 책을 곳이 마땅치 않고, 또 정리해둘 책장도 없다는 거였다.

또다시 천사들이 나타났다. 상인들로 구성된 수유시장도서관의 목공팀이 나서서 자재값도 안 받고 책장을 짜주었다. 공동체실은 순식간에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기적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강의 때마다 빔 프로젝터의 부재가 아쉬웠던 나는 다시 페친들에게 호소했다. ‘1만원의 기적’이 필요하다고. 순식간에 144만원이 모였다. 거기에 약간의 돈을 더 보태 빔 프로젝터를 설치했다.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러나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주위의 시선이나 편견, 외로움 따위의 감상적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2년여간 강의하면서 아이들과 소풍 한번 가지 못했다. 이따금 계획을 세워보긴 했다. 단체로 영화를 보러 가자거나, 호프집에서 회식 한번 하자거나, 등산 한번 해보자거나, 큰맘 먹고 1박2일로 동해안에 가보자는 둥. 그러나 단 한번도 실행하지 못했다. 매번 꿈만 꾸다 말았고 그럴 때마다 놀림과 힐난이 쏟아졌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샌드백이 되어 주었다. 바보처럼 나는 그게 참 좋았다.

2주에 한 번 인문학 강의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강의 때 원장 수녀님과 사회복지사들은 시쳇말로 슈퍼맨이 되어야 했다. 스무 명의 엄마들을 대신해서 스무 명의 아기들을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원장 수녀님이 참 대단하셨다. 조그만 체구였지만 아기 서넛은 거뜬히 돌보셨다. 업고 안고 먹이고, 얼르고, 기저귀 갈아주고…. 그 수녀님이 시설을 떠날 때 아이들은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나도 울었다.

지난 9월 순천도서관 강의 때 그 미혼모시설에서 만났던 아이들이 떠올라 강의하다 말고 펑펑 울었다. 시설에서 2년을 지내고 나면 의무적으로 나가야 한다. 월세보증금을 지원받아 나간 아이들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문제는 아기를 맡길 데가 없다는 것.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결국 구직을 포기하고 다시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린다.

‘한부모 아이 돌봄 서비스’라는 게 생겼다기에 무척 반가웠다. 진작 그런 게 있었더라면 원장 수녀님 허리가 휘지도 않았을 테고, 1년에 한번이라도 아이들과 소풍 수업을 할 수 있었을 테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라 생각했다.

엊그제 모 국회의원이 그 예산, 바로 그 돌봄 서비스 예산 61억원을 전액 삭감해야 한다고 주장했단다. 듣는 순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나서야 한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떠올랐다. 사람공동체의 무수한 가치와 덕목 중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까. 아기를 낳는 건 한 엄마지만 그 아이를 온전히 기르는 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자 의무다.

도대체 정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건가. 정치인은 대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가.

<최준영 | 거리의 인문학자·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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