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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


 

‘국가적 과제 달성을 위한 자원동원과 집행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체제.’ 일본 군국주의나 독일 나치정권 같은 전체주의 체제를 소개할 때 딱 들어맞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의 한 역사교과서가 유신독재를 옹호한 대목이다. 뉴라이트 계열인 ‘교과서포럼’이 펴낸 <한국 근현대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보수단체의 공동대표 출신인 박효종 교수가 박근혜 대선캠프에 정치발전위원으로 기용돼 논란이 크다. 역시 정치발전위원인 이상돈 교수도 “5·16을 쿠데타라고만 볼 수 있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박근혜 의원은 “5·16은 구국의 혁명이었다. 유신체제도 역사에 판단을 맡겨야 한다”는 소신을 이제 실천하는 단계로 가는 것 같다. 박 의원은 대선 출마선언에서 경제민주화를 외쳤지만 유신독재에 대한 긍정적 소신을 보면 민주화란 말이 위장전술이나 호객행위로 읽힐 뿐이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도서관 개관식에 참석한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경향신문DB)


5·16에 대한 박 의원의 생각은 이성계의 조선조 창건에 대한 세종대왕의 생각과 같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조선뿐 아니라 고려도 그랬고, 왕조 간 무력투쟁을 정당성 여부로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5·16은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을 총구로 뒤엎은 쿠데타 아닌가. 이 두 사실을 어떻게 동일한 기준에서 비교한단 말인지, 나는 귀를 의심한다. ‘박정희 왕조’를 세습하겠다는 공개적 언명으로 들린다. 그렇지 않아도 작년은 5·16 쿠데타 50년이었고 올해로 유신 선포 40년을 맞는다. 유신체제에 대해 따져보아야 5·16의 숨겨놓은 목적을 알 수 있다.


첫째, 유신헌법은 기존 헌법에 규정된 절차에 근거한 개헌이 아니었다. 대통령 박정희가 특별선언과 비상조치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한 것은 헌법에 근거하지 않은 체제 파괴로 사실상 내란행위였다. 둘째, 유신헌법안은 이른바 비상국무회의가 의결해서 국민투표로 넘겼다.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들로 구성된 비상국무회의가 그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한 코미디였다. 국민이 직접 선출한 의회가 아니고는 입법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민주주의의 기본 규범이 유린된 것이다. 셋째, 유신헌법이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에 대한 허가나 검열을 금지한다는 명문 규정을 삭제하고 또 인권보호의 핵심장치인 구속적부심제 등을 폐지한 것은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했다는 증거다. 넷째,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고 어용단체 성격의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선하도록 한 데다 또 몇 번이고 연임할 수 있게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거기에다 대통령은 국회 해산권, 국회 동의가 필요없고 사법적 심사도 배제한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3분의 1의 추천권, 대법원장과 모든 판사들에 대한 임명·보직·파면권까지 가졌다. 이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인 권력분립이나 견제와 균형을 파괴하고 대통령 1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왕조적’ 체제였음을 의미한다. 다섯째, 박정희는 유신체제의 명분으로 북한의 남침 위협을 내세웠으나 1970년대 초 한반도 주변은 긴장 완화 분위기였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1971년 12월20일자에서 박정희가 선포한 국가비상사태에 대해 “존재하지도 않는 ‘상상적 비상’ ”이라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새마을운동 성역화사업 준공식에 참석, 박정희 전 대통령 동상을 만져보고 있다. (경향신문DB)


무엇보다도 유신체제는 박정희 정권이 수많은 비판세력과 야당 정치인들에게 고문과 테러를 자행하면서 만들어냈다. 불법적이고 반문명사적인 강압과 공작정치의 산물이었다. 


19대 국회와 차기 정부는 국민 위에 군림한 ‘유신왕조’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해야 한다. 유신권력이 자행한 고문, 테러, 사법살인, 강제해직 같은 ‘더러운 전쟁’에 대해 역사적 심판을 내려야 한다. 야권의 대선주자 중 이 문제에 확실한 입장을 밝힌 사람은 김두관 전 경남지사다. 그는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을 넘어서 이미 자신이 독재자”라면서 “국민 위의 박근혜를 국민 아래 김두관이 이긴다”고 대선 출마선언의 화두를 열었다. 다른 대선주자들뿐 아니라 시민사회가 함께 이 역사문제에 대해 공론의 장을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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