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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급식실의 조리노동자가 시간에 쫓겨 미처 솥을 식히지 못한 채 후드 청소를 하다 뜨거운 솥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에밀레종의 인신공양 ‘설화’가 장인의 열정을 드러내는 예술영화라면, 조리실 노동자가 솥에 빠진 사연은 이거 ‘실화’냐를 묻게 만드는 공포 영화다. 20대 청년 노동자가 용광로에 빠져 숨졌던 것이 불과 7년 전이었음을 생각하면, 새로운 K호러 장르라 할 만하다.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배경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어느 집 침실이다. 머리맡에 가습기를 틀어놓고 잠든 한 가족이 있다. 얼마 후 이들은 원인을 모르는 급작스러운 폐질환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게 된다. 또 다른 집 거실이다. 쌀쌀한 날씨에도 보일러를 켜지 않았다.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가게를 운영하지만, 집에 가져오는 수입이 도무지 없다. 5년 동안 조금씩 밀린 건강보험료가 이제 150만원이다. 식구 중에 누가 덜컥 아프기라도 할까 봐 매일이 살얼음판이다.

이번에는 학교로 가보자. “공부-밥-공부-밥-공부” 하루 종일 학습노동에 종사하는 창백한 얼굴의 청소년들에게 소화불량과 변비, 스트레스는 직업병이다. 그렇다고 학교 밖 세계가 나은 것도 아니다. 청소년들의 알바 현장은 폭언과 성희롱, 저임금과 각종 위험이 난무하는 야생의 세계다. 11월28일, 이 K호러의 주인공들이 국회에 모인다. 가련한 피해자가 아니라, 건강할 권리를 주창하는 시민으로서 마이크를 잡게 된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잠재력이다. 그래서 건강은 다른 것들에 앞서 기본적 권리로 간주된다. 한국 정부도 비준한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12조는 “이 규약의 당사국은 모든 사람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의 신체적·정신적 건강을 향유할 권리를 가지는 것을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개헌 논의가 활발하다. 정치제도 개혁을 넘어 인권의 가치를 헌법에 보다 분명하게 담자는 목소리도 크다. 건강권도 그중 하나다. 현행 헌법 36조 3항은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는 모호한 규정을 담고 있다. 앞서 소개한 규약과 달리, 시민적 ‘권리’로서의 건강과 그에 대한 국가의 ‘의무’를 잘 드러내지 못한다. 헌법에 건강권이 명시적으로 규정되면, 헌법을 근거로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률의 개선이 이루어질 수 있다. 또 건강권이 침해되는 사례에서 헌법재판을 통해 구제가 가능해진다.

새로운 조문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개헌의 과정이다. 건강권이 무엇인지, 현재의 문제점과 요구 사항이 무엇인지, 국가의 책임은 어디까지인지 시민들의 의견을 모으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러한 합의는 개헌 이후에도 구체적 법률의 개정, 사법 심판 과정에 널리 적용될 수 있다. 11월28일 국회에서 열리는 시민증언대회 ‘건강할 권리를 헌법에! 건강할 권리를 외치다’는 그 첫걸음이다. 말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사람, 함께 고민하고 싶은 사람, 모두 모이자.

<김명희 |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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