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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이라는 게 땅이 흔들리고 건물이 무너지는 걸로만 알았던 우리가 이번 포항 지진 이후 많은 사실을 새로 배우고 있다. 그 가운데 땅의 액상화 현상이 있다. 지하 지반은 흙의 단층과 물의 단층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데 지진이 이 둘을 섞이게 해 땅이 죽처럼 돼버리는 현상이다. 예전에 모래흙 장난을 칠 때 물웅덩이에 흙을 부어 메우려 했던 적이 있다. 흙을 충분히 붓고 손으로 탄탄히 만들면 금방 마른 땅처럼 보였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질척한 모습으로 돌아오곤 했다. 마당에 시멘트를 바를 때 마지막 공정인 ‘시야기’도 비슷한 현상이다. 덕지덕지 발라놓은 시멘트를 손바닥이 들어가는 납작한 공구로 판판하게 두드리는 작업인데, 이걸 하다 보면 밑의 수분이 올라와 시멘트 표면이 매끌매끌해지며 명경처럼 얼굴을 비춘다. 물이라는 것의 속성은 이렇듯, 빈틈이 있으면 뚫고 들어가서 코빼기를 내미는 데 있다.

지진이 날 때 나는 일본 교토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배 위에 있었다. 오사카를 출항해 부산항까지 19시간 걸리는 2만t급 크루즈의 방 한 칸을 차지하고 말이다. 배를 탄 이유는 단 하나, 비행기 공포증 때문이다. 배도 가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비행기에 비하면 꽃마차다. 그런데 바다에는 해진이 한창이었다. 일본 내해를 지나올 때는 견딜 만했지만, 동해로 빠져나오자마자 파도가 심하게 쳤다. 마침 동해상에는 풍랑주의보도 내려져 있었다. 앞뒤, 좌우, 상하로 그 큰 배가 상당히 흔들렸다. 배가 바다 깊숙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아아, 여기가 고래 배 안은 아니겠지?

나는 육지에 딱 붙어서 살 팔자인가 보다. 하늘이든 바다든 건너가는 게 이토록 힘들다니. 그래서 내게 지진은 무서운 이야기다.

교토에서는 닷새 정도 혼자 머물면서 유명한 사찰들을 둘러보았다. 도후쿠지, 기요미즈데라, 산주산겐지, 긴카쿠지 등등. 가는 곳마다 내 앞에 펼쳐지는 어마어마한 장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절정은 교토 옆 나라시에 있는 도다이지였다. 도다이지의 본당은 목조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한다. 시쳇말로 자금성보다 컸다. 사는 집은 미니어처처럼 해놓은 사람들이 절은 왜 이리 크게 지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큰 건물이 주는 충격, 그것도 서양식의 화려한 건축이 아니라, 요소와 변화가 적은 동양 건축의 거대한 위용은 낯선 것이었기에 더욱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백제 도래인 후손들이 헤이안 정부 요직에 자리 잡으면서 당시 사찰 건축에 상당히 관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기분이 더욱 미묘했다.

크기를 제외하고 절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한국의 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입구에 사천왕상이 있고, 본당에 부처가 앉아 있으며 좌우나 후방에 산신 등을 모시며 석등과 부도가 정원 군데군데를 채우고 있었다. 날렵한 지붕과 건물의 전체적인 윤곽, 정원, 하늘이나 나무를 받아들이는 공간까지 모든 게 조화로웠다. 한마디로 빈틈이 없었다. 특히 지붕이 눈길을 끌었는데 우리가 흔히 보는 기와집이 아니다. 얇은 나무판을 여러 겹으로 겹쳐서 단단해 보였고, 그 위는 노송나무 껍질을 잘 펴서 덮어놓았다. 이끼가 끼어 지붕 전체가 초록색이었다. 일본의 전통 건축은 수십년마다 해체해서 수리하기 때문에 원형이 오래 유지되고 기술 전수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고 한다. 우리의 경주도 생각났다. 교토의 절과 신사가 생활공간과 섞여 여전히 기도사찰의 역할을 하며 손때가 더해가는 반면, 경주의 유적들은 우리와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느낌이 강하다. 시간과 함께 퇴화해가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이런 교토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전 세계에서 몰려온 사람들이 주말과 평일을 가리지 않고 몰려다니니 뭔가를 차분하게 감상할 여지가 없다.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교토의 사찰을 제대로 느끼려면 전날 한 곳을 전략적으로 택해 충분히 공부하고 오전 8시30분 문 열 때 들어가서 한두 시간 둘러보는 게 가장 바람직할 듯하다. 10시만 돼도 인파가 출렁거려 빠져나갈 궁리를 하기에 바쁘다.

건축이든 음식이든 인간의 손길이 스며들어 고도의 예술로 꽃피운 꽉 찬 도시 교토를 다녀오며 새삼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에 대해 떠올리게 됐다. 밑이 비어 지하수가 침범해 땅이 액체가 되는 일이 문화 영역에서도 가능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특히 트렌드를 좇고 변화에 발맞추다 보면 반드시 빈곳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다소 늦되어 보이는 듯해도 차분하게 하던 일을 하며 정말 필요한 변화를 수용하는 것이 빈곳을 메워가며 앞으로 나아가는, 안전하면서도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강성민 | 글항아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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