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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법조계의 화두는 상고법원이다. 사법정책자문위원회는 지난해 6월 대법원장에게 상고법원 도입을 건의했고, 여야 의원 168명이 지난해 12월 상고법원 설치 법안을 발의했다. 대법원에 접수된 사건 수는 2004년 2만432건에서 2014년 3만7000건이 넘었고, 대법관 1인당 사건 수는 3000건 이상이다. 대법원이 밀려드는 사건의 홍수에 빠져 사건 처리에만 급급해지면, 대립되는 가치를 비교형량하여 분쟁 해결을 위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사회 갈등을 해소하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상고제도는 이미 여러 차례 변경됐다. 대법관과 일반 법관이 함께 재판하기도 했고, 대법원과 고등법원 상고부가 상고사건을 분담하기도 했으며, 상고허가제를 실시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심리불속행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소위 ‘이유 기재 없는 판결’에 대한 불만이 매우 커서 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점에 대하여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상고법원안은 대법원과 별도로 상고법원을 설치해 상고법원 판사가 상고사건 중 일부를 재판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사건에 집중해 합리적인 가치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고, 상고법원은 개인 간의 다툼에 관한 재판에 집중해 개인의 권리구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고법원의 취지에 관해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상고법원의 신설은 최고법원인 대법원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도 상고허가제 등을 통해 상고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고, 헌법재판소도 헌법상 재판을 받을 권리가 모든 사건에 대해 대법원에서 재판받을 권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상고법원의 법관을 임명하는 데 국회의 동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상고법원의 민주적 정당성이 취약하다거나 국민주권의 원리에 반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국민주권의 원리나 민주적 정당성을 오해한 것이다. 우리 헌법은 대법원에 ‘대법관이 아닌 법관’을 둘 수 있다고 하여 대법관 아닌 법관도 상고심을 담당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한편 대법관 수를 3배로 늘려서 대법원의 포화상태를 해결하자는 의견은 사법부의 본질적인 역할을 간과한 것이다. 대법원이 국가권력을 견제하면서 다수의 위험으로부터 소수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대법관 전원이 논쟁을 거쳐 결론을 도출하고, 다양한 의견이 판결문에 드러나는 전원합의체 방식이 필수적이다. 대법관의 수가 대폭 늘어나면,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열띤 법리 논쟁이나 심도 깊은 토론은 불가능해지고, 전원합의는 찬반투표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토론을 통한 설득의 기회를 보장받지 못한 최고법원이 소수자 보호라는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상고법원 개념도 (출처 : 경향DB)


대법원이 최고법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하루빨리 제도화해야 하고, 상고법원안은 현재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새로운 물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여성의 종중원 자격, 퇴직연금의 재산분할 가능성 등과 같은 사회와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쟁점에 관한 합리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가 필요하고, 국민의 진정한 권리구제를 위해서는 사실심 강화라는 과제도 동시에 해결되어야 한다.

대법원의 현재 상태가 개선되지 않아 발생하는 피해도, 상고법원 도입의 열매도 모두 대법원이 아니라 국민에게 돌아간다. 이제는 소모적인 논쟁을 중단하고 보다 합리적인 대안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제도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김명숙 | 고려대 교수·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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