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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그 여름 이후 ‘희망’이라는 낱말을 볼 때마다 나는 버스를 떠올린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내달린 버스에서 바라본 푸른 들판, 부산의 밤하늘 그리고 뜨거운 목소리. 나는 4년 전 여름 ‘희망버스’에 오른 수많은 사람 중 하나다.

사실 ‘희망버스’라는 말이 낯간지러웠다. 희망이라니, 그것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별은 너의 별 언젠가 별을 따주마 약속하는 것처럼 허황하지 않은가. 과대 포장한 과자 봉지와 같은 ‘희망’의 껍데기를 쓰고 오랫동안 고공농성을 하는 절박한 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내가 한진중공업 김진숙을 응원하는 희망버스에 오른 것은 하늘 밑 세상 꼭대기에서 홀로 수많은 낮과 밤을 보낸 한 사람의 간절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희망버스에 오른 것은 한 사람의 목소리를 가까이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크레인 위에 서야 했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희망버스에 오른 것은 희망 때문이었다. 정말 그 여름 부산에서 나는 희망을 봤다. 세상을 바꾸고, 더 큰 꿈을 꾸는 그런 거창한 희망이 아니다. 언젠가 내가 벼랑 끝에 내몰려 을밀대 지붕이든 크레인 위든 굴뚝 위든 올라가 소리칠 때, 분명 함께 분노하고 손 흔들어 줄 사람이 있을 거라는 희망.

그 희망은 소박했다. 4년 전 여름밤, 청년들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노래를 부르고, 노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고, 젊은 엄마는 잠든 아이에게 부채질을 해줬다. 그리고 그들은 종종 크레인을 올려다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희망은. 나는 여전히 그 여름의 희망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4년 전 여름에 대해 다른 기억을 요구한다. 대한민국 법정은 4년 동안 희망버스 승객들에게 놀랍게도 여러 죄명을 매달았다. 그리고 희망버스의 책임자라며 셋을 꼭 짚어내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버스에 수만명이 탔는데, 어찌 셋만 죄인인가?

설마 그들이 모를까? 희망버스가 이 사회의 질서를 위협하고 혼란에 빠트렸다고는, 그들도 믿지 않을 것이다. 희망버스와 관련된 수만장의 사건 기록과 자료를 들춰본 그들은 뻔히 안다. 희망버스에 오른 사람들의 가방에는 소풍 가는 아이들처럼 김밥이 들어 있었고, 버스에서 내려 길을 행진하는 사람들은 오합지졸 뒤꽁무니 따라가기에 바빴고, 한밤중에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노래를 불렀을 뿐이라는 걸. 강제로 막지 않았다면, 해산하라고 윽박지르지 않았다면 그 여름밤은 조용했을 거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수만명의 승객 모두 누군가의 강요와 강제 때문이 아니라 저 스스로 좋아서 희망버스에 올랐다는 걸 모를 리 없다.

그러니 희망버스에 죄명을 달고, 책임자를 엄벌하겠다는 것은 사법적인 뜻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들은 기억을 지우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내가 부산에서 희망을 봤다는 기억, 모두 함께 한 곳을 바라본다면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다는 기억. 그들은 불편한 기억을 지우고자 굳이 칼을 뽑아들었을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기억은 ‘희망버스는 희망을 보여준 적이 없다!’는 것이리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 열린 박근혜 정부와 사법권력의 예술탄압 규탄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희망버스’를 기획해 1심에서 실형을 받은 송경동 시인의 가면을 쓰고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분명 기억이란 신뢰할 수 없는 것 중 하나다. 누군가 끊임없이 노력한다면 희망버스에 대한 기억도 조작할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 잊힐 수 있다. 그렇지만, 반복되는 기억은 쉬 지워지지 않는다. 밀양에도 희망버스가 달렸고, 쌍용자동차 굴뚝 아래에도,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 고공 광고탑 앞에도 희망버스가 닿았다.

지난 6일에는 다시 부산시청 앞에서 고공농성하는 생탁과 택시 노동자를 응원하는 희망버스가 부산을 다녀왔다. 11일에는 이런 모든 자발적인 희망버스 운동에 대한 탄압에 맞서는 시민들과 문화예술인들의 ‘동행버스’가 이른 아침 부산 법정을 향해 출발한다. 이렇게 희망은 여전히 곳곳에서 달리고 있다. 죄 없는 이들을 가둬도, 다그쳐도 희망버스는 달린다. 희망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박래군, 정진우, 송경동을 가두지 마라. 우리의 기억에 손대지 마라.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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