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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재판에 대한 개혁이 논의되고 있다. 지금 대법원은 국가·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충실하게 심리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사건 처리 지연으로 권리 구제 역할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대법원의 업무 과중이 한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솔직히 대법원의 업무 과중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이런 결과는 대법원이 자초한 부분도 있다. 하급심이 전권으로 행사한 사실심리 결과를 법률심인 대법원이 뒤집는 사례가 있었고, 그것이 알려지면서 실오라기라도 잡고 싶은 패소 당사자는 파기율이 6%에 불과해 거의 희망이 없음에도 대법원에 상고로써 호소하게 된 탓이다.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소송에 대한 사회적 분위기와 국민의 권리의식도 크게 변화됐다. 예전에는 인정과 신뢰로 해결되던 분쟁이 소송으로 치닫고 있다. 매년 늘어나는 법원의 사건 수가 이를 말해 주고 있고, 소송만능주의가 남의 나라 일이 아니게 됐다. 국민은 자신의 권리침해에 대해 매우 민감할 뿐만 아니라 법을 활용하는 데에도 적극적이다. 심지어 결론에는 불만이 없음에도 단순히 재판을 지연시켜 미결수로 있는 기간을 늘리려고 하거나, 강제집행 시기를 최대한 늦추기 위해 상고제도를 악용하는 경우도 있다.

이같이 다양하게 제기되는 상고사건을 모두 대법원이 판단해야만 하는 것일까. 우선 하급심의 잘못을 가리는 대법원의 기능은 하급심을 강화해 해결할 문제이다. 상고심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한 나라 사법제도의 수치이다. 다만 하급심의 강화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법원의 제도개혁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재판절차를 개선하고 판사의 자세와 충실함을 보강하는 것뿐 아니라 소송대리인의 역량강화와 소송구조시스템의 정비 또한 뒷받침돼야 한다.

4월에 있었던 ‘담배소송’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한국금연운동협의회 서홍관 회장(오른쪽)과 2009년 폐암으로 사망한 이기홍씨의 동생 이기호씨(왼쪽) 등 소송 관련 인사들이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출처 : 경향DB)


대법원이 모든 사건을 다 처리하려 하는 데서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상고심 개선은 대법원의 근본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하급심의 잘못을 가려 개인의 권리를 구제하는 기능만 한다면야 사건 수에 따라 대법관 수를 늘리면 될 일이지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이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대법원은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 기준이 통일되도록 기본적 가치에 대한 최종 판단을 내리는 역할을 해야 한다. 헌법이 대법원을 최고법원으로 정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률 선진국으로 불리는 독일 역시 상고사건 수 급증에 대응해 2002년 민사재판에 상고허가제를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독일은 대법관 증원론 또는 대법원 판사 도입론의 모델이 된 나라이다. 그런 독일에서조차 사법 자원이 무한하지 않으므로 대법원의 기능을 법의 형성 발전과 판례 통일에 집중시키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일뿐 아니라 미국,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선진국은 모두 상고제한제도를 채택해 대법원 사건 수를 대폭 줄였다. 이들 나라에서 대부분의 사건은 2심으로 끝난다. 우리나라 역시 이러한 추세를 따라가지 못할 것도 없지만, 하급심 강화가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 바로 상고허가제를 도입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이번에 상고심 개선 방안으로 대두되고 있는 상고법원안은 이런 문제에 관해 기존에 없던 참신한 답을 내놓았다. 개별적 권리 구제를 위한 상고심 기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법원의 최고법원 기능을 강화하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국가·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대해 지혜의 횃불을 밝히고, 상고법원은 개별 사건에 대해 하급심이 간과한 법률적 쟁점이 없는지를 충실하게 심리하게 된다. 이 제도의 장점을 살린다면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는 대법원과 상고법원 양쪽에서 두텁게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개별적인 권리 구제를 위한 사건과 법령의 최종적·통일적 해석을 위한 사건을 구별해 처리하는 것이 모든 국민을 위한 최적의 사법서비스 제공이라는 인식과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이제 우리 국민의 권리보장과 대법원의 기능 회복을 위해 논의의 결실을 보아야 할 때이다.


이용구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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