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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검찰을 비판하고, 검찰개혁을 말한다. 하지만 어떤 수사든 유무죄는 법원에서 가려진다. 법원의 최종적인 승인 없이 검찰만의 전횡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권력은 반드시 법원권력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법원권력의 한가운데에는 대법원이 있다. 과거와 달리 지금의 대법원은 정권의 외압을 받지 않는다. 지금의 대법원은 권력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다. 특히 박근혜 정권 들어서 대법원이 보여준 권력지향성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2015년 1월 박상옥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이 대법관에 임명제청된 것부터 이상했다. 박 원장은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의 담당검사 출신이다. 아무리 검찰 출신이 대법관에 임명될 차례라고는 하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다른 자리도 아닌 대법관에 임명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변호사단체와 시민단체의 거센 반발이 이어졌다. 당시에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무리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이 폭로되면서 그 단서의 일부가 밝혀진다. 박영수 특검이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수첩을 확보했는데, 그 수첩에 박 원장 관련 내용이 메모돼 있었던 것이다. 양 대법원장이 청와대의 뜻에 따라 박 원장의 대법관 임명을 강행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 조합원들이 8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인사권을 무기로 일선 법관들의 개혁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양승태 대법원장은 즉각 퇴진하라”고 요구했다. 김영민 기자

그뿐 아니다. 2015년 3월 대법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발령된 긴급조치 9호는 대통령의 통치행위이기 때문에 국가배상책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긴급조치 9호는 2013년에 이미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렸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통치행위라는 이유로 국가배상책임을 부정한 것이다. 워낙 정치적인 판결이다 보니 대법원 판결인데도 이에 대해 반발하는 하급심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2015년 5월에는 국정원이 경력법관 임용자들에 대해 사상검증식 신원조사를 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사법의 독립을 침해하는 중대한 사태였는데도 법원행정처장이 고작 “부적절하거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례를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는 반응을 법원 내부통신망에 밝혔을 뿐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도 빼놓을 수 없다. 원 전 국정원장은 지난 대선 때 댓글공작을 통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이유로 고등법원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원 전 국정원장 사건이 2013년 1월에 제기된 대통령 선거 무효소송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제3자가 선거과정상 위법행위를 저질러 선거인들이 자유로운 판단에 의하여 투표할 수 없게 된 경우 그 선거는 무효가 된다. 따라서 원 전 국정원장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이 유죄로 인정될 경우 지난 대선은 무효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감히 대통령 선거를 무효로 판결하는 것은 차마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일까? 2015년 7월 대법원은 공직선거법에 대해 유죄를 선고한 고등법원 판결을 파기하였다. 단 한명의 반대의견도 없었다. 원 전 국정원장의 변호인은 대법관을 거쳐 이명박 정권에서 총리까지 지낸 김황식 변호사였다.지난해 말 국정원이 대법원장을 사찰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유신독재의 망령이 대법원장까지 쫓아다녔다는 것은 매우 충격적이다.

대법원도 ‘중대한 반헌법적 사태’라고 논평했다. 이번에는 법원 내부통신망이 아니라 공식발표였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망령은 청와대 혼자서 불러들인 것이 아니다. 대법원은 망령의 굿판에서 향불을 피워 올렸던 것이 바로 대법원 자신이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며칠 전 대법원이 사법독립을 주제로 한 일선 판사들의 학술행사를 축소시키려 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대법원은 부인하고 있지만 대법원이 이 행사를 적극 장려하지 않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쯤 되면 과연 대법원에 사법의 독립을 지킬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한눈에 보는 정부 2015’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법 신뢰도는 OECD 평균 54%에 훨씬 못 미치는 27%였다. 42개 국가 중 39위다. 권력 앞에 비굴했던 대한민국 대법원의 초라한 성적표다.

나승철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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