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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은 여전히 테러 비상이다. 영국에서는 올 들어 모두 3건의 테러가 발생했다. 지난 3월에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에서 차량돌진 테러가 있었고, 맨체스터 공연장 테러에 이어 수도 런던에서 차량, 흉기테러가 또다시 일어났다. 필리핀에서도 이슬람국가(IS)와 연계된 무장단체 공격으로 계엄령이 선포 중이다.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공포와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언제까지 폭력적 극단주의 광기에 세계가 유린되어야 하는지 걱정이다.

왜 이렇게 테러는 계속되는가? 테러의 구조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의 틀을 찾아내는 일은 너무 복잡하고 쉽지 않은 사항이다. 서구의 역사적 과오, 부당하게 빼앗긴 자의 소리 없는 눈물과 응어리, 서방에 의해 짓눌린 종교적 가치와 문화적 자존심에 대한 아랍인들의 모욕감에 대한 세심한 배려의 부족 등은 공격하는 측의 주장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실제 이상 과장된 측면이 있다. 극소수 급진 테러 조직들의 명분과 이데올로기에도 불구하고 9·11 직전까지만 해도 테러라는 방식은 억압받는 이슬람 세계의 일반적인 대응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슬림이 내세우는 종교적 가치와 자긍심에 대한 무참한 유린이라는 종교적 이유는 십자군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힘을 동원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미국 팝가수 아리아나 그란데가 4일 밤(현지시간) 영국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 올드트래퍼드에서 지난달 22일 자신의 공연장에서 벌어진 테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자선콘서트를 열고 있다. 맨체스터 _ AP연합뉴스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오늘날 유럽이 경험하고 있는 테러의 끔찍함과 공포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적 이유를 내세우지만, 테러를 일으키고 지속시킨 배후의 실제 힘은 경제적 갈등과 차별과 같은 ‘경제적 동기’라는 로레타 나폴레오니의 분석이 타당할지 모른다.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의 테러리스트들은 대부분 그 사회에서 소외와 차별로 정체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민 2~3세의 이단아들이다. 그들이 극단화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정치, 종교적 이념보다는 가난하고 열등한 상태에서 주변인으로 살아야 하는 유럽의 길거리이기 때문이다. 소외와 차별은 좌절하게 하고, 희망이 없는 좌절은 분노로 인한 자포자기식 행동을 야기하는 게 테러의 일반적 공식이다.

최근 독일 ‘슈피겔’의 편집국장 클라우스는 “이라크, 시리아 등 실패국가에서는 경제가 붕괴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무기력과 분노에 빠진 힘없는 젊은이들이 서방 및 아랍의 힘센 자들을 타격함으로써 일종의 보상심리를 얻기 위해 테러에 나서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중동발 테러의 원인은 “경제적 불평등 때문”이라 주장하며, 테러를 막기 위해서 “유럽은 통합과 일자리 창출을 되살려야 한다”고 촉구했다.

물론 대규모 난민 유입과 테러로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에서 반이민과 배타적 국수주의로 사회적 분위기가 급변하는 것을 단순히 경제적 계산과 정치적 지배에 젖은 서방의 이기적 발상이라고 탓할 수만은 없다. 이슬람 공포증에 사로잡힌 유럽인들에게 무슬림과의 대결과 반목 대신 공존과 변화의 길만을 주문하는 것은 또 다른 이기심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단절된 것의 넓은 포용 없이는 결코 평화는 요원하다는 사실이다. 한번 갈라진 상대는 상호공존하기 쉽지 않으며, 더구나 서로가 상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토인비가 말한 이성의 진보가 역사를 이끌었다는 것은 상호 간의 공격이 아니고 바로 평화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 구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갈수록 극심한 청년실업 문제로 절망의 벼랑에 몰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상태가 불안에서 좌절로, 그리고 이제는 분노로 향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래서 유럽의 테러는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IS의 한국에 대한 테러를 걱정하기에 앞서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과 차별이 어떤 파괴적 결과를 낳을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이다.

새 정부는 ‘통합과 공존’을 가치로 제시했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다. 이제 차별이라는 문제는 차별 억제 등의 단순히 소극적이고 수동적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기본적 권리 실현이라는 적극적 차원에서 주장되어야 한다. 이는 최대한의 민주적 참여와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안전과 자유로운 번영과 평화는 혼자가 아닌 함께의 중요성을 직시할 때만 실현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이만종 | 한국테러학회장·호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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