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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은 북한강과 남한강의 큰 물줄기가 만나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 역사의 큰 스승이며 주자를 뛰어넘는 조선후기 최고의 학자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고 묻혀 계신 곳이다. 

강진에서 18년간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온 선생은 1822년 임오년 회갑을 맞아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쓴다. 그 첫머리에 “이 무덤은 열수(洌水) 정약용의 묘이다. 본 이름은 약용(若鏞)이요, 자(字)는 미용 또는 용보라고도 했으며, 호는 사암(俟菴)이고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인데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듯 조심하고,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라고 쓴다. 이 글을 통해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열수라는 호를 즐겨 썼다는 것이다. 이는 한강의 옛 이름으로 선생은 그의 모든 저서에 ‘열수 정약용이 쓰다’라고 적어 넣음으로써 한강변 마재마을에 대한 긍지와 애착을 표현한다. 학문적 사유의 시작과 완성이 이곳에서 이뤄졌음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는 선생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전 국민은 선생을 다산이라 부른다. 다산(茶山)은 야생차가 많이 나는 전남 강진군 귤동마을 뒷산의 이름으로 유배 당시 10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1930년대 정인보·안재홍 등 ‘조선학운동’의 주역들이 “선생께서는 위기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이 바르게 살아가야 할 도리와 백성들을 잘살게 할 개혁안을 500여권의 책에 담아낸 다산초당에서의 업적이 너무 훌륭하므로 ‘정다산’으로 불리는 것이 맞다”며 붙여준 호이다. 이제 다산을 열수로 바꿔 부르자는 얘기는 아니지만, 열수의 의미를 알리고, 이곳 마재마을이 강진의 다산과 함께 잘 알려지기를 바란다. 

둘째, 선생이 가장 불리기를 원했던 호는 사암이다. 이는 <중용> 29장인 ‘왕천하(王天下·천하를 다스림) 장(章)’에 나오는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가져온 것으로, 뒷날 나타날 성인(聖人)으로부터도 학문적으로나 살아온 행적에 대해 질책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자신감과 떳떳함이 배어있는 가장 선생다운 아호(雅號)이다. 유학자인 선생은 내세가 아닌 살아있는 현세에서 성인이 되는 게 학문을 하는 목표였다. 선생은 ‘자찬묘지명’에 “알아주는 이는 적고 꾸짖는 사람만 많다면, 천명이 허락해주지 않는 것으로 여겨 불에 태워버려도 괜찮다”라고 적으며 당대에 자신의 학문적 성과가 평가받지 못함을  무척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후세에는 반드시 본인의 뜻을 알아주는 세상이 올 것임을 믿었다. 오늘날 우리가 선생을 사암이라 부르기를 주저하면 안 되는 이유이다.

셋째, 여유당이란 당호에선 선생의 불우했던 정치적 환경을 엿볼 수 있다.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로 ‘여’는 머뭇거리기를 겨울의 냇가를 건너듯이 하고, ‘유’는 망설이기를 사방을 두려운 마음으로 살피듯이 조심하며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여유당이라는 당호에선 당시의 정치적 시류와 타협하지 않으나 경계하려는 선생의 의지와 함께 노자가 생각하는 도인의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선생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는 20일부터 21일까지 남양주시는 ‘정약용을 생각하자’라는 주제로 정약용 사색의 길 걷기와 문화제를 개최한다. 팔당에서 마재마을까지 한강변에 펼쳐진 아름다운 열수 길을 걸으며 선생을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김남기 | 정약용문화교육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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