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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온몸이 한 줌의 땀방울이 되어/ 저 해방의 강물 속에 티도 없이 사라져야/ 한 춤꾼은 비로소 구비치는 자기춤을 얻나니 … 딱 한발떼기에 일생을 걸어라.” <님을 위한 행진곡>의 원본인 백기완 선생님의 시 ‘묏비나리’ 한 구절이다. 1979년 박정희 사후 전두환에게 끌려 가 서빙고 보안사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후 15년형을 받고 독방에 갇혔을 때, 5·18 학살 소식에 치를 떨며 감옥 천장에 입으로 쓰며 외웠던 시라 하신다. 박정희 때 함께 고문을 받던 장준하 선생께서는 ‘백기완이는 죽이지 마라. 그가 죽으면 우리나라 민족예술의 보고가 사라진다’고 고문관들에게 부탁하시기도 했다 한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등 고운 우리말을 찾아 살려놓은 것도 그였다. 청년시절 그를 쫓아다니며 배웠다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이야기처럼 ‘전승할 사람을 찾을 수 없는 독보적인 민족민중문화재’였던 선생님. 

그런 선생님을 늦게나마 지척에서 십수년 뵐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2009년 용산 철거민 참사 당시 이건 ‘참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말하던 그. 2010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 당시 갑자기 밀어닥친 공권력에 맞서 점거한 포클레인 위에서 전깃줄에 매달려 저항하고 있을 때 맨 먼저 달려와 위험한 순간을 막아준 이도 그였다. 2011년 한진중공업 김진숙 고공농성 157일차에 1차 희망버스 운동을 시작할 때 든든한 배후가 되어 준 이도 그와 문정현 신부님이었다. 이후 진행된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거제조선소 비정규직, 부산생탁, 구미스타케미칼, 삼척동양시멘트 등 모든 희망버스의 1호차 차장은 늘 백기완 선생님과 여러 사회원로들이었다. 2012년 쌍용차에서 스물 두 번째 정리해고 희생자가 났을 때 대한문 앞에 사회적 분향소를 설치하며 경찰들과 회오리가 되어 맞붙던 날도 함께 서 계셨던 기억. 작년 10시간에 이르는 심장수술 이후 지금은 쉽지 않지만, 단언컨대 지난 십수년 선생님만큼 작은 자리 어둔 자리 가리지 않고 노동자 민중 연대를 구체적인 몸으로 실천한 사람은 사회운동하는 이들 중에서도 많지 않다. 그는 받듦을 받는 어른이 아니라 이름 없이 싸우는 노동자 민중들에 대한 길거리 섬김을 그 누구보다 앞서 실천해온 동지였다. 

소원이 있다면 끝까지 거리에서 싸우다 쓰러지고 싶다 하신다. 가진 자들을 위한 법은 법원과 국회와 저 높다란 행정부나 청와대 안채나 고상한 분들의 고담준론 속에 품위 있게, 안전하게 있을지 모르지만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법은 거리와 광장에서 피 터지는 ‘즉자적인’ 한숨과 절규와 아우성 속에 있음을 일찍이 간파하셔서일까. 모든 생명들의 온전한 권리와 존엄을 빼앗고 짓밟는 반생명의 무리들을 “깨트리지 않으면/ 깨져야 하는 (무산자들의) 철학”(시, ‘나의 철학’ 중에서). “야 기완아! 이웃들도 다 어려운데 네 배지만 부르고 네 등만 따스하고자 하면 키가 안 커. 몸뚱어리 키도 안 크지만 마음의 키도 안 큰단 말이야” 하던 가난한 어머니에게 배웠다는 사상. 민중들이 입으로 구전해 왔다는 그 민중사상의 원형.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 그 민중사상이 어떤 것인지를 남겨놓고 가시겠다고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몰래몰래 목숨을 걸고’ 쓰신 ‘버선발 이야기’ 끝장을 덮으며 숙연해진다. 그런 맨발의 시민 민중들이 일궈낸 지난 촛불항쟁의 결실이 함부로 버려지는 오늘. 우리가 다시 ‘버선발’이 돼 걸어야 할 거리와 광장의 역사와 정신을 다시 한번 새겨본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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