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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을 보면 매니저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등의 일정을 관리하고, 그와 관련된 업무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또는 ‘회사나 호텔 따위의 경영자나 책임자’라고 설명하고 있다. 전자는 경영, 관리, 보좌를 하는 일이 중심이고 후자는 경영 책임자를 의미한다. 이런 매니저의 역할이 연예계나 체육계가 아닌 교육계에서도 화제가 되던 시절이 있었다. 얼마 전 서울 강남 대치동 등 소위 교육특구 지역의 밤 10시 풍경은 말 그대로 매니저 전성시대였다. 고급 승용차들이 학원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을 태우려고 줄 서서 대기하다가 순식간에 아이들을 싣고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은, 하루에도 여러 번의 행사를 뛰어야 하는 연계인의 모습과 빼다 박은 듯 비슷해서 이렇게 자녀를 관리하는 엄마들에게 ‘엄마 매니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런 열혈 엄마 매니저들은 연예인 매니저들과 아주 비슷한 일을 했다. 유능한 과외선생이나 잘 가르치는 학원강사들을 찾아내어 계약하고, 촘촘하게 시간 관리를 하는 것이 주 임무였고 정보의 관리가 가장 중요했다. 그렇다보니 인맥과 정보를 모을 수 있는 강남과 같은 교육특구 지역이 활동하기에 알맞았다. 이들은 특별한 지역을 중심으로 점점 그 세를 키워서 ‘돼지엄마’라는 이름의 신종 매니저로 진화했다. 입시에 성공한 엄마들이 다른 엄마들의 부탁을 받아 여러 학생들을 졸졸 이끌고 다니는 그룹 관리형 매니저가 되었고, 일부는 아예 학원과 같은 사교육기관의 상담실장이나 주인으로 등극하기도 했으니 이들의 진화는 포켓몬스터나 디지몬의 진화를 넘는 속도전의 연속이었다.

그러다가 급제동이 걸렸다. 그동안 이들의 업무는 학교 수업이 끝난 이후에 시작되어 자정이 넘어서 마무리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대학입시에서 합격자들의 3분의 2를 학교 안의 성취를 통해서 결정하는 방식으로 바뀌자 학교 밖에서 할 수 있는 일이 확 줄어버렸다. 더구나 재수생들의 몫을 빼면 재학생들에게 학교 밖에서 해 줄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거나 또는 엄청나게 대단한 수준이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3년이라는 시간의 벽이었다. 인간의 능력은 워낙 미스터리해서 짧은 기간이라도 극단적으로 압박을 하면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데, 그런 기회를 원천봉쇄하고 3년간 꾸준히 차근차근 성취를 이루는 것은 물론, 친구들과 협력과 공감을 통해서 함께 성장하는 모습까지 요구하니 이전과 같은 방식의 입시 정답을 만들기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이들의 진화가 과연 여기가 끝일까라는 의문이 들 때쯤, 진화를 뛰어넘는 또 한 번의 창조적(?) 돌연변이를 하게 된다. 그 이름이 ‘코디’. 이들도 기본적으로는 실제 성공을 경험한 돼지엄마들과 같은 노련한 경험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과거와 같이 단순한 학교 밖 시간의 관리자가 아닌 학교의 안과 밖에서 모든 순간을 통제하는 수준이라 엄청난 비용을 요구한다. 그렇다보니 이들을 고용할 수 있으려면 집이 아닌 성에 사는 수준이어야 한다는 후문이다. 하늘의 성, 스카이캐슬.

돼지엄마들의 이런 놀라운 진화에 대해서 진화생물학자들이 뭐라고 설명할지 정말 궁금하다. 진화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급격히 이뤄졌다는 굴드의 ‘단속평형설’이 맞을까? 아니면 아무것도 계획되지 않은 자연선택이라는 도킨스의 ‘눈먼 시계공’ 이론이 맞을까? 생물학까지 동원해야 설명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현실이 놀랍고도 씁쓸하다.

<한왕근 | 청소년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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