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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는 1년 반에 걸친 조사연구를 거쳐 지난 2월16일 열전 수록 여부를 집중적으로 검토할 대상자 405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죽은 사람만 있고 죽인 사람은 없는, 맞은 사람만 있고 때린 사람은 없는 한국현대사에서 처음으로 가해자 405명의 이름을 편찬위원회 공동대표 네 분이 하나하나 읽어내려 갔다. 그동안 독재인명사전, 반민주행위자인명사전 등을 만들자는 논의가 무성했지만, 제대로 실천에 옮겨진 바 없었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첫 고비는 넘은 셈이다. 해방 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편찬된 <친일인명사전>의 경우 4389명의 수록인물 중 생존자는 단 2명이었던 데 비해, 이번에 발표된 405명 중 거의 절반이 생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친일인명사전>에 비해 살아있는 권력의 반발이 훨씬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2015년 7월 처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을 제안했을 때부터 대중의 관심은 이승만·박정희가 포함되느냐였다. 이번 발표를 보면 두 사람 모두 포함되어 있다. 이들을 포함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촛불의 힘이었다. 적폐 청산에는 제도 개혁 등 여러 가지 접근법이 필요하지만, 인적 청산을 빠뜨려서는 안된다. 감히 말하건대, 인적인 면에서 본다면 대한민국의 적폐 중 적폐는 이 명단 안에 다 들어있다. 이 명단 선정 기준의 하나가 ‘행위 당시의 법률로도 범죄행위를 구성하는 경우’이기 때문에 이 명단에 오른 사람들은 정의가 바로 세워졌다면 다들 감옥에 갔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절대다수는 감옥에 가기는커녕, 거꾸로 민주인사들을 감옥에 보내고 권력을 누렸다.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못했는데, 다시 민주정권이 들어선다고 이들을 새삼 감옥에 보낼 수 있을까? 불가능할 것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파괴한 자들을 현실의 법정에 세우지는 못했지만, 역사의 법정에만은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일제강점기 36년의 역사가 낳은 <친일인명사전>이 4389명을 수록한 것에 비하면 70년 헌정사에서 헌법을 파괴하고 유린한 자를 400명 선으로 정리한다는 것이 턱없이 적어 보일 수 있다. 줄잡아 40만~50만명이 목숨을 잃은 민간인 학살의 경우 겨우 66명이 선정되었으니, 골짜기에서 한 200~300명 끌고 가 죽인 현장책임자급은 다 빠진 셈이다. 큰 간첩 사건의 경우 직접 고문을 한 수사관, 사건을 조작한 수사기관 간부, 무고한 사람들에게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의 사다리를 올라가며 유죄를 씌운 검사와 판사들을 합치면 한 사건에서 이름 적어야 할 사람이 100명도 넘게 나온다. 이미 재심에서 무죄가 난 사건만 해도 110건이고, 수백건의 재심사건이 진행 중이거나 준비 중인데도, 고문조작과 간첩조작을 합쳐 겨우 194명이 이름을 올렸을 뿐이다. 그만큼 명단에 오른 사람들의 혐의가 엄중한 것이지만, 이 사람들의 열전 수록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 편찬위원회에서도 신중에 신중을 기하기 위해 꼼꼼한 자료수집과 평가 과정을 거칠 것이고, 외부전문가들의 검증과 당사자나 가족들의 이의제기를 고려하여 수록 여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번 명단에 수록된 사람들 중 현직으로는 국정농단 사태나 세월호 구조 직무유기 등의 혐의로 박근혜 대통령이, 2012년 대선 수사방해 등의 혐의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름을 올렸다. 또 뜻밖에도 인권의 최후 보루여야 할 사법부의 수장 양승태 대법원장도 무려 6건의 간첩 사건 판결과 관련하여 명단에 포함되었다. 405명 중 여성은 박근혜·조윤선 단 2명뿐인데, 이는 여성이 헌법을 파괴할 만한 권력 근처에 접근해 보지 못했던 여성차별의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명단 정리를 하다 보니 이들 중 상당수는 내란이나 고문조작의 ‘공로’로 받은 훈장을 지금도 갖고 있다.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했건만, 관련 공무원들은 고문조작을 한 자들이나 학살자들에게 응당한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고 있다. 마땅히 바로잡혀야 할 부분이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은 이제부터이다. 시민 여러분의 동참을 기대한다.

후원: 국민은행 006001-04-208023 (사)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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