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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회가 정책과 예산의 우선순위를 결정할 때에는 그 사회의 가치를 담게 된다. 약자를 배려하는지, 생명이나 안전을 고려하는지, 정의로운 분배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지 등등. 그런데 한국사회에서는 기득권과 표에 기반을 둔 토건사업과 대기업 지원정책이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안전’은 비용으로 간주되어 후순위에 놓였는데, 녹색당이 제기한 학교 인조잔디 유해성 문제도 같은 맥락이다.
2006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교육청, 지방자치단체들이 예산을 투입해 학교에 인조잔디를 깔기 시작했다. 보기에 좋고, 관리가 효율적이라는 이유였고, 관련 업체는 호황을 누렸다. 그러나 지난해 국민체육진흥공단이 학교 인조잔디의 유해성 실태를 조사한 결과는 충격적이다.
서울 노원구에 위치한 한 초등학교의 인조잔디운동장에서 초등생들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뛰어놀고 있다. (출처 : 경향DB)
조사 대상 1037개교 중 941개 학교에서 유해물질이 검출됐고 174개 학교에서는 납, 6가크롬 등 인체유해물질이 기준치 이상으로 검출되었다. 납이 기준치의 87배나 검출된 학교도 있고, 환경호르몬인 다환방향족탄화수소 합계가 기준치의 348배가 넘은 곳도 있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고 난 이후 사회의 대처이다. 경향신문 취재 결과, 서울시내 학교 27곳에서 기준치 이상이 검출됐는데, 그중에서 운동장 출입을 막은 곳은 5곳에 불과했다. 15개 학교는 운동장에서 체육수업을 그대로 진행하고 있다. 교육청이나 학교에서는 “기준치 이내면 괜찮다”, “새것으로 재설치하면 된다”며 인조잔디 개보수와 교체 방침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준치에 미달됐더라도 검출된 만큼 유해하다. 유해물질의 ‘허용 기준치’는 안전하다와 위험하다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관리기준이다. 인체에 유해하다면 안 쓰면 된다. 천연잔디나 마사토로 교체하면 되는데 또 예산 탓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초·중·고 학생들은 세계 다른 어떤 나라 학생들보다 학교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공부하고 먹고, 뛰노는 공간이 학교인데, 학교가 위험하면 어떻게 하나? 문제는 인조잔디만이 아니다. 환경부가 전국적으로 실시한 라돈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661개 학교 중 27%인 177개 학교에서 100베크렐 이상의 라돈이 검출된 것으로 나왔다. 라돈은 토양이나 암석, 물에서 라듐이 핵분열할 때 나오는 가스로 고농도에 노출되면 폐암이나 신장 독성을 유발한다.
석면문제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기준으로 서울시 초등학교 조사대상 562곳 중 88%인 497곳의 학교에서 석면이 검출된 것으로 나타났다. 석면 자재가 하나도 없는 ‘클린 학교’는 41곳뿐이었다.
이 정도 되면 학교 내 유해물질에 대한 종합대책을 수립해야 할 판이다. 대책의 핵심은 예산이다. 석면이 학교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유도, 인조잔디를 철거하고 천연잔디를 깔지 못하는 이유도 예산 부족이다. 방사능으로부터 안전한 학교급식조례도 식품방사능계측기 구입비용과 인력충원이라는 예산 문제에 부딪히고 있다. 교육부의 무지와 안일함이 문제다. 교육부가 유해화학물질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환경부와 협력해 적극 관리하고, 예산을 마련해서 개선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교육부와 일부 교육청은 인조잔디의 오염사실을 알고도 정보조차 공개하지 않았다. 위험정보에 대한 정보공개 운동부터 해야 할 판이다. 그리고 ‘학교 환경시설 개선예산’은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안전’보다 ‘돈’을 추구하는 사회적 구조가 세월호 참사를 낳았다. 또다시 ‘돈’ 때문에 학교 안의 안전과 학생들의 건강조차 지키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돈’이 최고인 사회에서 학생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정부가 세월호 사고 이후 떠들썩하게 홍보했던 안전관련 대책과 예산은 학교 안 유해화학물질 대책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투표할 권리가 있다면 유해화학물질로 범벅된 학교환경을 이대로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유진 |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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