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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이 ㄴ의 복부를 절개했다.’ 이 문장은 섬뜩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ㄱ이 의사이고 치료 목적으로 ㄴ의 동의하에 수술을 한 것이라면 합법적 의료행위가 된다. 의사와 칼을 든 강도의 차이는 행위의 목적과 동의 여부가 핵심이다. ㄴ이 미성년자라면 부모가 친권자로서 동의권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ㄴ이 메르스 확진판정을 받았다면, 외출할 경우 자신과 타인의 피해가 예상되므로 ㄴ의 자율성과 이동의 자유는 제약될 수 있다. 만일 ㄴ이 급성기 정신증상으로 동의 능력에 문제가 생긴 정신과 환자라면 동의권자는 누가 되어야 할까? 본인의 동의 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정신과 보호입원치료에 관한 이슈의 핵심은 이 결정을 누가 하는가에 달려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를 가족과 의사에게만 맡기지 않고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이자 우리가 당면한 현실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입원 결정은 정신과 전문의 권고와 가족의 동의로 이루어져 왔다. 1995년 제정된 정신보건법은 비인가 요양원에 있던 환자들이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는 법적 기반을 제공했다. 하지만 문제도 발생했다. 작년에 일어난 ‘강남역 살인사건’ 같은 고통스러운 현실은 치료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예방가능한 일이었다. 중증정신질환자의 범죄율은 일반인보다 낮다. 하지만 치료받지 않는 시기 일부 급성기 환자의 폭력과 자살 위험은 일반인보다 높은 것이 사실이라 안전을 위한 치료는 절실하다.

작년 9월 헌법재판소는 기존 정신보건법의 헌법불합치판정을 내리면서 국가가 보호입원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제3자가 치료 필요성에 대한 판단을 하도록 하는 절차를 갖추도록 했다. 정부와 국회가 헌재 결정 전 법 개정을 준비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개정법에 따라 오는 5월30일 이후로는 2주 이상의 치료 목적으로 입원을 하려면 국공립 병원 등 서로 다른 기관에 속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인의 진단이 필요하다. 입원적합성심의위원회도 1년 시범사업을 거쳐 2018년부터 도입된다. 인권과 복지의 기준을 제시한 의미가 크다. 하지만 급하게 입안되는 과정에서 이해하기도 실행하기도 힘든 구조의 법이 만들어졌다.

치료입원을 위해 서로 다른 의사 2인이 필요한데 현재 국공립 의사는 140명 수준이다. 정부 계획대로 16명가량 추가 선발한다 해도 수요를 맞추기엔 어림없다. 연간 24만건의 입원 중 68%가 이에 해당하는데 2주 이후 3개월마다 서로 다른 2인이 필요하다. 결국 민간지정기관이라는 이름으로 공무원이 아닌 민간정신병원 의사들이 자기 입원환자 60명을 내버려두고 다른 병원의 진단을 위해 동원되어야 한다.

탈수용화가 되려면 병원의 인력이 집중적인 사례관리로 전환하여 재발을 낮추거나, 지역사회 정신건강증진센터나 사회복귀시설, 주거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져야 한다. 장기 입원환자의 퇴원을 막는 첫 번째 이유는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가 감당할까. 이미 1인당 100명 넘게 사례관리를 하고 있는 정신건강증진센터의 정신보건전문요원들에게 또 책임을 넘길 것인가. 법은 있는데 법에 예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고 실제 변화도 없다.

전면 재개정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급한 대로 서로 다른 2인 진단 문제는 개정법에서 민간지정기관을 삭제하고 이를 입원적합성심의위원회에 소속된 전문의로 바꾸면 비교적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 평가도 서류심사에 그칠 일이 아니라 전문적 영역으로 위원회에 위촉된 중립적 전문의에게 맡기고 입원에 대한 결정은 평가를 참고하여 위원회가 국가의 이름으로 내리면 된다. 잘 운영되면 인권과 치료를 다 잡을 수 있는 건설적인 방향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구나 인생의 어떤 시기에 정신질환이 생길 수 있다. 정신질환자는 차별 없이 보호받고 치료받아 사회로 복귀할 수 있어야 한다. 탈수용화를 하려면 최소한 비를 피할 곳은 마련해주고 가까운 곳에서 언제든 전문가를 만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의료인은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자. 2인 진단도 힘들겠지만 제도만 갖춰지면 전문가들도 협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보호입원 결정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져야 한다. 그동안 국가가 방치해 민간에 맡겨놓았던 것을 국가가 가져간다고 할 때 이 정도의 책임을 기대하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일까?

백종우 | 경희대 의대 교수·정신건강의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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