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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주인과 노예를 상징하는 포조와 럭키가 등장한다. 럭키는 두 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포조는 거만하게 그를 억압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결국 나중에 충격적인 몰골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럭키는 벙어리가 되고 포조는 장님이 된 것이다. 럭키는 왜 벙어리가 되고 포조는 장님이 됐을까.

<고도를 기다리며>의 포조와 럭키의 비극처럼 우리 사회는 1인자의 명령만 존재하던 ‘군주공화국’의 처절한 몰락을 경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행복시대를 가져다줄 고도로 생각했지만 그는 연설문 한 장, 참모 인선은 물론 의상 한 벌까지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던 맹목의 지도자에 불과했다. 청와대 참모와 새누리당 친박계 의원, 정부 고위공무원 중 그 누구도 파멸의 길로 가는 박 대통령을 잡아끌어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명령 수행에만 열중한 나머지 박 대통령은 더욱 눈이 멀어갔고 참모진은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벙어리가 됐다.

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신처럼 믿고 떠받들었던 1인자는 따로 있었다. 그는 대통령 연설문 고치는 것을 취미로 삼으면서 강남에 비밀아지트를 만들어 국정을 쥐락펴락했다. 그의 책상에는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청와대 참모들이 가져다준 서류들이 항상 가득 쌓여 있었다는 증언도 나왔다. 박 대통령을 우상처럼 섬기던 최순실씨는 어쩌다 대통령까지 지배하는 최고의 비선 실세가 됐을까.

두 사람의 40년 우정을 되돌아보면 최씨는 부모를 잃고 동생들과도 절연한 대통령이 세상으로 통하는 유일한 출구였고 반대로 외부에서 박 대통령을 만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입구였다. 바로 여기서 불행이 시작됐다. 헤겔은 “주인은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것을 노예에게 명령하면 되고, 바로 이 때문에 주인은 노예에게 의존하게 되고 노예 없이는 못 사는 존재가 된다”고 했다. 반면 노예는 끊임없는 자기계발과 변화를 통해 자립적 존재로 성장한다는 것이 헤겔의 통찰이다.

헤겔의 ‘노예와 주인의 변증법’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최씨에게 의존할수록 점점 무기력해진 반면 최씨는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을 대신 떠맡으면서 점점 강해졌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개성공단 폐쇄 등 국가안보와 관련된 정책에까지 손을 대게 됐다. 얼마 전까지 최씨를 가까이서 지켜본 한 측근 인사는 ‘수렴청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문제는 최씨가 박정희 정권 시절 인사들을 끌어들이면서 박 대통령은 타임머신을 타고온 ‘유신공주’처럼 점점 더 시대감각을 잃었던 데 있다. 돌이켜보면 최씨의 국정농단 시스템이 안착된 시점은 공안통치의 화신인 김기춘 비서실장이 청와대로 들어온 2013년 8월로 보인다. 당시 김 실장 인선안은 최씨에게 먼저 보고됐고 얼마 안 있어 박 대통령은 10대 재벌 총수들과 오찬회동을 갖고 재벌들 민원을 청취했다. 이때부터 경제민주화 공약은 뒤로 밀리고 재벌 위주의 성장논리와 공안통치 바람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전국승마대회에서 우승을 놓친 최씨의 딸 문제를 과감히 처리하지 못한 문체부 고위간부가 졸지에 ‘나쁜 공무원’으로 몰려 좌천된 것도 이 시기다. 문체부 내부에서는 김기춘 실장이 1급 공무원 6명의 명단을 차관에게 주면서 자르라고 지시했다는 얘기가 돌고 있다. 성분검사에서 불량 판정을 받은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미르재단 설립 당시 문체부 공무원이 세종시에서 서울까지 달려와 헐레벌떡 민원서류를 접수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눈 밖에 나면 잘린다는 생존본능은 2013년 국정원 선거개입 수사 당시 무서운 칼바람을 경험한 검찰도 마찬가지다. 특히 1인자의 명령에 절대복종을 강조하는 문화는 저성과자 해고와 성과연봉제라는 형태로 노동자들의 일터에까지 확산시킬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처럼 최순실 시계가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났던 40년 전으로 돌아가면서 남북관계는 파탄나고 가계부채는 1300조원을 넘어섰으며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이제 박 대통령이 고도가 아니라 최씨의 조종을 받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사실을 자각한 사람들은 ‘탄핵’과 ‘하야’를 요구하고 또 다른 메시아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명박과 박근혜가 그렇듯 누군가 자신을 구원해주길 막연히 기다리는 사람에게 반기문도, 문재인도, 안철수도 메시아가 될 수는 없다. 고도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삼성 직업병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며 386일째 농성 중인 반올림 농성단, 백남기 농민 부검영장을 몸으로 막아낸 시민지킴이, 손배 폭탄과 해고 위협에도 30일째 흔들림 없이 파업을 이어가는 7000여명 철도노동자가 메시아요, 고도다.

강진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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