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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 불사약(不死藥)을 상상하는 심정이야 이해되지만 죽음을 피할 도리는 없다. 죽음은 재벌 총수든 고용되어야 먹고 살 수 있든 처지를 막론하고 찾아오는 듯 보인다. 그러나 생로병사에 의한 자연법칙인 것처럼 보이는 죽음에도 슬며시 계급법칙은 끼어든다.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과도노동으로 인한 사망 즉 과로사(過勞死)는 보편운명이 아니라 노동이 유일한 밥벌이 수단인 사람에게 떨어지는 날벼락이다.

과로사는 천형(天刑)이 아니다. 산업사회 이전에 과로사는 없었다. 물론 사고로 인해 혹은 짐승의 습격으로 인해 죽는 사람은 있었겠으나,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죽음에 이르는 경우는 없었다. 합리적으로 추론해보면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론이다. 계절의 제약에 경제활동이 갇혀 있는 한 아무리 포악한 지주라 하더라도 노동시간을 억지로 늘릴 재간은 없다. 농사가 경제의 주된 요소인 한겨울이 되면 노동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과로사가 모든 산업사회의 보편운명이라고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자. 과로사는 ‘특정한’ 노동 관행을 용인하는 어떤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특정 현상이다. 무한이윤을 달성하기 위해 폭주하는 경제 작동방식이 과로사를 만들어낸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일본식 사회시스템은 ‘가로시(かろうし)’, 즉 과로사를 낳았다. 과로사 현상이 없는 나라에선 과로사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그래서 영어사전에는 ‘가로시’를 알파벳으로 표기한 단어 ‘karoshi’가 수록되어 있고 “과잉 노동으로 인한 사망(death from overwork)”이라 풀이되고 있다. 가로시의 나라 일본은 ‘자이바츠(財閥)’를 음차한 ‘zaibatsu’ 또한 영어사전에 올렸다. 그에 뒤질세라 한국어 재벌 또한 ‘chaebol’이라는 단어로 영어사전에 등장한다. 자이바츠에 상응하는 재벌처럼 일본산 가로시에 한국어는 과로사로 응답한다.

통계청의 ‘2015년 생명표’에 따르면 한국인의 기대수명은 평균 82.1세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되고 있는 인구변동의 와중에 그 종착점에 절반도 이르지 못한 채 과도한 노동으로 인해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있다. 대단한 역행이다. 그들은 모두 젊고, 또 너무 많이 노동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2016년 우편집배원 6명이 근무 중 사망했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1명을 제외한 5명은 우편물 배달 도중 과로사했다. 2017년 2월6일, 전날 밤 11시까지 우편물 분류작업을 하고 퇴근한 45세 집배원 조모씨가 사망했다. 2017년 1월15일 세 아이의 엄마인 35세 보건복지부 공무원은 정부세종청사 10동 6층 계단에서 숨졌다. 이 공무원은 토요일에도 근무했고 일요일까지 출근했다가 사망했다. 2016년 12월27일 하루 12시간 이상 조류인플루엔자 방역 업무를 담당하던 40대 공무원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11월의 42시간, 12월의 무려 45시간에 달하는 추가 야간노동은 결국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한 게임회사의 38세 회사원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모두 기대 여명의 절반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2015년 기준 한국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2113시간, 독일은 1371시간이다. 한국인은 독일인보다 일년 동안 무려 92.7일 더 일한다. 가로시의 고향 일본 역시 한국처럼 장시간 노동으로 악명 높지만 한국인은 일본인보다 연간 394시간 더 일한다. 아프면 결근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결근이 상식이다. 아프다고 마음 편하게 직장에 결근을 통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피곤해서 오늘만은 야근 못하겠다고 누가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프거나 피곤해도 대부분의 사람이 출근하고 추가 노동을 한다. 이 역설을 학문에서는 ‘프레젠티즘(Presenteeism)’이라 설명한다. 우리 일상의 언어로 번역하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억지 출근과 인내하는 과잉노동이라 해도 무방하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결근이 아니라 노동을 선택한 사람이 과로사했을 때 과로사를 입증할 책임은 어이없지만 유족의 몫이다. 유가족이 남편의 혹은 아내의, 사랑하는 딸과 아들의 죽음이 과로 때문임을 증명해야 과로사로 산재 판명을 받을 수 있다. 업무시간은 과로사 판단의 주요 지표이다. 하지만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의 노동시간을 기록할 의무는 없기에, 과로사로 강하게 의심되는 사람이 얼마나 과로했는지를 입증할 자료는 찾기 쉽지 않다. 2011~2014년 과로사 산재 승인율은 23.8%에 불과하다고 한다. 과로사라는 날벼락 뒤에 과로사 입증이라는 해괴한 장벽이 유족을 가로막고 있는 셈이다.

가로시의 나라 일본에서는 ‘과로사방지대책추진법’이 만들어졌다. 만약 일본이 가로시 탈출에 성공한다면 과로사는 지구 유일의 한국적 ‘종합특징’이 될 수도 있다. kimchi(김치) bibimbap(비빔밥) chaebol(재벌)에 이어 영어사전에 karoshi를 대체하고 ‘kwarosa’(과로사)가 등재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았다. 찬양과 조롱을 동시에 받았던 뉴욕타임스에 실린 한국 홍보광고가 생각난다.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아느냐고 돌연 영어권 독자에게 묻는 “Do you know?” 광고와 이영애의 “Bibimbap?” 추신수의 “Bulgogi?” 김윤진의 “Kimchi?”를 대체할 한국의 종합특징을 낱낱이 전달하는 광고 헤드카피로 이건 어떤가? “Do you know Kwarosa?”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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