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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기고]최영도 변호사님께

opinionX 2018. 6. 14. 15:08

변호사님, 이렇게 황망히 가시다니 너무하십니다. 지난해 필생의 역작 <아잔타에서 석불사까지> 출판기념회에서 책에 저자 서명을 받은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가실 줄 몰랐습니다. 변호사님 만나면 서명 받아 제 아이들에게 주려고 따로 구입한 책은 제 방 책꽂이에 있습니다.

선배님, 황인철·조영래 변호사님을 만났을 때인 1988년 처음 인사드렸던 것 같습니다. 보성 후배라 하니 정말 좋아하셨지요. 그리고 보성학교 간송 전형필 선생과 화가, 시인 선생님들, 인문학적 분위기와 전통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최장수 동문회장을 하셨을 정도로 모교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지요. 제가 대한변협 인권위원으로 위원장님 모시고 일할 때는 재미있고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위원장님은 후배가 인권위원장이 되었어도 인권위원으로 활동하셨습니다.

회장님, 항상 어려운 일이 있으면 제일 먼저 회장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2002년 FX 사업에 대해 양심선언을 한 조주형 대령 기억하시지요. 당시 구속 군인들은 면회도 제한되고 구속기간도 길었습니다. 회장님 말씀대로 헌법소원과 함께 위헌법률의 효력을 정지해달라고 가처분신청도 했습니다. 면회 제한 규정은 효력정지 가처분을 받았고 구속기간 규정은 이미 연장되어 가처분이 기각되었지만 결국 위헌결정을 받았지요. 창군 이래 구속 군인들이 받았던 인권침해 문제를 해결한 일이었습니다.

변호사님, 지난 2월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 명덕상 받으시면서 “법원이 법관을 사찰했다면 사법부 존재 가치를 의심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1971년 1차 사법파동. 판사 대표로 민복기 대법원장을 만났을 때 작성한 문서가 ‘사법부 독립선언서’가 되고 토머스 제퍼슨이라는 별명도 얻으셨지요. 1973년 30대 중반 해직판사로 천안으로 쫓겨가 변호사 사무실을 내셨어도 인권과 정의를 위한 한길을 걸으셨습니다. 40여년이 지난 지금 사법농단이라 할 정도로 사법부는 무너졌습니다. 부끄럽습니다. 1988년 2차 사법파동, 2009년 5차 사법파동까지 몸살을 앓고도 이 나라 사법부는 바로 설 기미가 없습니다. 사법파동은 판사들 노력만으로는 사법개혁을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제 사법혁명을 외쳐야겠지요. 법원노조 공무원들이 집단단식을 시작했습니다. 안에서 판사들도 나서고 밖에서는 우리 변호사, 교수, 공화국 주인 모두 나서 사법혁명을 이루려 합니다.

변호사님은 보통 사람 3명의 삶을 사셨습니다. 법조인, 문명여행가, 음악애호가로. 부디 사랑하는 분 모두 만나 천상의 음악 들으시면서 가끔 후배들도 보아 주세요. 국립중앙박물관 ‘겸산 최영도관’에 선배님 애인, 토기 만나러 가면 뵐 수 있겠지요. 고맙습니다.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를 들으며 이덕우가 올립니다.

<이덕우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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