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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트렁크 문이 열린 차 옆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트렁크 밖으로는 청테이프로 칭칭 동여맨 여자의 맨다리가 삐져나와 있다. 이 이미지에는 ‘The Real Bad Guy(진짜 나쁜 남자)’라는 제목이 붙었다. 그리고 이어진 설명. “여자들은 나쁜 남자를 좋아하잖아? 이게 진짜 나쁜 남자야. 좋아 죽겠지?” 잡지 ‘맥심’의 2015년 9월호 표지였다.

여성들은 경악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 심지어 살인을 미화하고 상품화하는 이미지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표지는 판타지로서의 ‘나쁜 남자’와 ‘범죄자’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면서 위험함, 길들여지지 않음, 야만성이야말로 남자다움이라는 널리 퍼진 착각을 옹호하고 강화한다.

물론 유독 ‘나쁜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있다. 이때 ‘나쁜 남자’의 종류는 다양하고, 그런 남자를 원하는 욕망의 성격 역시 다양하다. 하지만 나쁜 남자를 좋아한다고 그것이 범죄의 희생양이 되기를 원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맥심’이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 사회는 나쁜 남자와 범죄자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의 ‘나쁜 남자’는 여성 판타지라기보다는 남성 판타지에 가깝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를 떠올려보자.

영화는 조재현이 연기한 포주가 거리에서 여자들을 구경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여대생’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여대생에게 다가가 강제로 키스한다. 마침 여대생의 애인인 남대생이 등장해 포주의 얼굴을 가격하고 모욕을 준 뒤 여대생과 함께 떠난다. 포주는 앙심을 품는다. 그는 결국 여대생을 납치해서 성매매 업소에 감금해 놓고 그녀를 판다. 하지만 이보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영화의 결말이다. 결국 여대생은 포주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트럭 한 대를 구해 전국을 돌아다니며 성매매를 시작한다.

2001년 작품이다. 당시 일부 평단은 기층 남성의 날것의 분노와 계급 전복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며 열광했다. 그러나 이런 열광에서 의도적으로 오독된 것은 계급 전복의 방식이었다.

이 작품이 여성을 착취하고 있다는 비판에 대해 옹호자들은 착취가 아니라 기층 남성과 부르주아 여성 사이의 계급투쟁이라는 입장을 견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부르주아 남성과 기층 남성의 갈등을 그리고 있고, 그 속에서 여성은 그저 몸뚱어리이자 소유물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이 영화를 설명할 때 “건달이 짝사랑하는 여대생을 납치했다”고들 표현한다(범죄가 사랑으로 포장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포주가 여대생을 다른 남자들에게 판매하면서 관음할 뿐, 그녀에게 구애하지 않는다는 것은 인상적이다. 이는 포주가 원했던 것은 사랑이 아니라, 여대생의 ‘몰락’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완벽하게 ‘소유’하는 것뿐이었음을 보여준다. 포주는 남대생의 소유물인 여대생을 갈취하여 자신의 재산으로 만드는 것에서 쾌락을 느낀 셈이다.

포주의 욕망은 최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던 ‘몰카를 보는 이유’와도 닮아있다. 한 남성 누리꾼은 “예쁜 여자들에게 기죽었을 때, (여성 화장실 몰카를 보면서) 걔네도 미개한 짓을 한다는 걸 확인하면 위안이 된다”고 썼다. 몰카 옹호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그건 ‘자연스럽고 순수한 성적 욕망’이 아니다. 그것은 남성이 여성을 소유하고 착취하는 것을 자연으로 여기는 사회에서 구성된 정치적 욕망이다.

여기에서 ‘나쁜 남자’는 여성의 판타지도 아니고,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성적 긴장 관계도 아니다. ‘나쁜 남자’는 오히려 위악을 통해 타인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남성 판타지임과 동시에 다른 남성과의 권력 투쟁 속에서 발생하는 긴장이다.

한 유력 정치인이 연인이었던 여성에게 “너 하나 감옥에 처넣는 것은 일도 아니다”라고 겁박하고, 그의 남성 동료들이 이 사건을 묻기 위해 발버둥쳤다는 뉴스를 보면서 질문하게 된다.

왜 저들은 여자를 ‘트렁크 속 시체’처럼 대하는가. 그리고 그런 남자들이 하는 정치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남성들의 ‘나쁜 남자’ 판타지야말로 고민거리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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