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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세금으로 정부가 운영하는 출연연구기관(정부출연연구기관)에 정부가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의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정부가 목적을 갖고 만든 기관에 거꾸로 정체성을 묻는 경우다. 어처구니가 없다.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소속되어 있는 25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지난해 정부가 낸 이 숙제를 하느라 진땀을 뺐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역할과 책임을 근거로 예산을 배정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각 기관은 공공성과 수월성 있는 성과를 바탕으로 기관의 책임과 역할을 재정립하는 작업을 진행했고 사업 포트폴리오도 새롭게 설정했다. 이 과정에서 각 기관은 행여 정부의 정책 방향과 어긋나지 않을까 고심하고, 정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관의 정체성과 국가의 과학기술 정책이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고 정부가 교체될 때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면 지속성을 담보로 한 과학기술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각 연구기관의 역할과 책임 수립과정은 기관의 구조조정으로 이어진다. 대부분의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외부에 내세울 만한 대표적 연구성과가 그 기관을 대표하는 색깔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기관의 수월성 있는 연구성과란 무엇인가? 이것은 대부분 고가의 최신 연구장비, 풍족한 연구비, 많은 참여연구원을 가진 사람에게서 나온 결과물이다. 문제는 이러한 연구성과가 해당 연구원의 정체성과 더불어 역할과 책임을 규정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정부의 질문에 답을 주는 기득권자들은 자신이 가진 장비, 연구비, 그리고 성과물로 포장하여 엉뚱한 답을 정부에 주는 경우도 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관구성원과 마찰을 빚기도 한다. 자신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업이 연구원의 주요 핵심사업이 되는가 하면, 사업을 위한 신규 구매 장비 역시 기득권자들을 위한 개인 연구장비가 연구원의 대표 장비로 포장되는 것이다.

연구원의 핵심사업을 설정하는 과정도 살펴보자. 자신들의 대표적 연구성과가 가령 생명공학과 신약 분야라고 예를 들자. 25개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소속 연구원 중 과학기술연구원, 생명공학연구원을 비롯한 족히 절반이 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이 분야의 핵심을 사업 포트폴리오에 넣었을 것이다. 정부가 원하는 선택과 집중을 통한 경쟁력 확보와 중복을 피한 기관 특성별 맞춤형 예산안이 어떻게 그려질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또한 어떻게든 정부의 입맛에 맞는 사업이 최전방에 놓일 것도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당장 성과를 내지 못하는 기초기술은 설 자리를 잃게 될 것이고, 이와 더불어 미래를 바라보며 원천적, 장기적 연구를 수행해야 할 정부출연연구기관은 근시안적 결과물에 희희낙락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제시한 안을 전문가 검토를 통해 사업 항목을 세심히 들여다볼 것이라고 밝혔다. 이와 함께 역할과 책임을 확정한 8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예산요구안은 최대한 보장하겠다고 했다. 아직 확정하지 못한 나머지 기관의 초조함이 읽힌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을 다루는 정부의 대응방식은 누가 봐도 서툴고, 주객이 전도된 느낌을 받는다.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하는 기관의 역할과 책임은 국가가 규정하는 것이 맞다. 이를 바탕으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각자의 기능에 맞는 비전과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책임과 역할을 다한 기관이 있다면 과감히 정리할 수도 있어야 한다. 역할과 책임이 중복된 기관은 통폐합이 답이 될 수도 있다. 

지난 12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국가과학기술연구회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과제중심제도에 관한 토론회를 개최했다. 언제까지 토론만 하고 있을 것인가. 탁상공론보다는 이제 답을 내는 정부가 되어야 한다. 예산이라는 목줄을 쥐고 흔들면서 정부출연연구기관을 좌지우지하는 정부가 아니라 진정한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을 위해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수행해야 할 역할과 책임을 정부출연연구기관 수장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정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엄치용 코넬대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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