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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임명된 군수뇌부 신고를 받으며 ‘칼은 칼집에 들어 있을 때 무섭다’고 한 문재인 대통령의 말을 듣고 우리의 민군관계가 아직까지도 많이 왜곡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예비역 일각의 남북군사합의에 대한 반발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은 군 수뇌부에 칼집에 넣어 두고 말고와 같은 정치적인 담론이 아니라 언제라도 쓸 수 있도록 칼날이 시퍼렇게 갈아 놓으라는 군사적인 요구를 해야 한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이런 발언은 오랫동안 왜곡된 민군관계가 대통령의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닌가 한다.     

강한 군대는 훌륭한 장교들이 만든다. 훌륭한 장교는 올바른 민군관계에 바탕한 유능한 전문직업군인을 의미한다. 올바른 민군관계와 훌륭한 장교단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이다. 민군관계가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군인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엉뚱한 생각을 한다. 민주국가일수록 정치와 군사의 영역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군의 가치를 존중한다. 그래야 장교들이 국방에 전념하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군대는 무적이다. 클라우제비츠가 민주주의 군대를 전제체제의 군대보다 강하다고 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훌륭한 장교단은 첨단장비와 무기보다 중요하다. 아무리 첨단장비와 무기가 많고 목숨을 바쳐 싸우려는 투지에 찬 병사들이 있다하더라도 장교들이 무능하면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장교는 아수라장 같은 전장의 혼돈 속에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내는 지적 통찰력, 부하들이 스스로 사지에 뛰어들 수 있게 만드는 리더십,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생명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는 희생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이런 자질은 쉽게 갖추어지지 않는다. 국가가 막대한 예산을 들여 사관학교를 운영하는 이유이다. 

국가가 사관학교를 운영하는 것은 유사시 전장에서 목숨을 바칠 전투지휘관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요즘 사관학교 우등생들 중 상당수가 전투지휘관이 아니라 법무장교나 군의관을 희망한다고 한다. 육군의 전방 연대 작전과장 중에서도 육사 출신들이 별로 없다고 한다. 가장 고생스럽다는 전방 연대 작전과장이 육사출신 소령급 장교들의 로망이던 적도 있었다. 영관급 장교들은 높은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띌 수 있는 고급사령부와 비서실에서 근무하기 위해 안달이라고 한다. 사관학교 졸업생이 법무장교나 군의관을 지망하고 영관급 장교들이 고급사령부와 비서실을 기웃거리는 것은 군의 가치관이 전도되고 있다는 증거다. 가치가 아니라 이익을 탐하는 군대는 썩는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군은 오랫동안 사조직과 연줄, 그리고 파벌로 얼룩져 있었다. 폐해가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부의 대처는 엄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진보정권으로 교체된 이후에도 사조직 출신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등용되었다. 사조직은 정리되는 듯했으나 연줄과 파벌은 교묘하게 작동했다. 대다수의 장교들은 그저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과거 군 수뇌부는 연줄과 파벌인사에 앞장섰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틈을 타 정치권도 군인사에 개입했다. 보수정권 당시 군의 최고책임자는 진급을 사적관계의 보상으로 이용했다는 내부평가를 듣기도 했다. 육군, 해공군 그리고 해병대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안다. 상황이 이럴진대 누가 삭막하고 외로운 전방고지와 망망대해 그리고 순간이 생명이 가르는 고독한 하늘에서 청춘을 바치고자 하겠는가?

장교단의 가치관 전도는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만든 과거 군수뇌부의 책임이다. 문제는 아래가 아니라 위에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많은 국방예산을 투입해도 밑 빠진 장독에 물 붓기다. 문제는 군 스스로 이런 문제를 고칠 수 있는 단계가 지났다는 것이다. 국민이 요구하는 강한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원칙이 살아있어야 한다. 국방개혁의 출발점은 문민 국방부 장관 임명부터 시작했어야 한다. 군출신 국방부 장관은 왜곡된 민군관계의 정점을 상징한다. 이것이 해소되지 않으면 연줄과 파벌로 전도된 장교들의 가치관을 바로잡기 어렵다. 혹자는 남북 간 군사정세를 들어 문민 국방부 장관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우스운 소리다. 잘못이라면 이제까지 국방부 장관 한 사람 교체된다고 북한의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군대를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시스템이 아닌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군대라면 지금이라도 바꾸어야 한다. 장교들이 자신의 헌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국민들이 이를 존중하도록 만들지 못하면 우리 군의 미래는 없다.

<한설 예비역 육군준장·순천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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