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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명의 노동자를 만났다. 노점상, 시장 상인 등 영세한 자영업자들이거나 보험설계사, 학습지 교사, 대리운전, 퀵서비스, 택배서비스 등 특수고용형태 노동자들, 혹은 가사노동자나 건설노동자들과 같은 일용직이었다. 아픈 곳은 없는지, 치료는 잘 받았는지를 물었다. 이들은 교통사고로, 또는 층계나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팔과 다리, 갈비뼈를 다쳤다. 노점상은 여름엔 뙤약볕, 겨울엔 찬 바람을 그대로 맞았고, 가사노동자는 청소용제로 눈과 목이 따가웠다. 장기간 육체노동으로 온몸의 관절이 아팠다. 대리기사와 가스검침원은 한밤중, 이른 아침, 늦은 저녁에 일을 하니 생활리듬이 깨져 수면도 식사도 불규칙했다. 호흡기, 소화기, 심혈관·근골격계의 만성질환을 달고 살지만, 의료비는 비쌌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생계가 문제였다. 일자리가 위태로워서 하루를 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자영업자는 거래처를 잃어버릴까 봐, 가사노동자들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까 봐 두려워했다. 택배노동자는 본인 수수료의 두 배를 내고 용차를 써야 해서 쉴수록 손해가 났다. 학습지 교사도 대체교사를 찾는 게 힘들어 산산조각난 손목뼈에 깁스를 하고 3개월간 일하기도 했다. 그러니 수술해야 하는 병에 시술만 받고, 제대로 치료받아야 할 병에 응급처치만 받고는 곧장 일터로 나갔다. 대리기사는 죽을 때가 돼야 입원을 한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몇 시간이라도 일할 기운이 있으면 그 시간이라도 일하다보니 길거리에서, 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돌아가시는 이들이 있었다. 버티다 결국 입원을 하게 되면 생계비는 모아둔 돈을 쓰거나 고금리로 대출을 받거나 동료들 사이에서 융통했지만, 특히 대리기사는 야간 노동으로 인해 사회적 관계가 단절돼 아무 경제적 대책이 없는 사람들이 20%는 된다고 했다. 

서울시에서 중위소득 100% 이하의 건강보험 지역가입자를 대상으로 하는 ‘서울형 유급병가’를 5월 중 도입한다. 휴가를 달라고 호소할 고용주조차 없는 이들이 아파도 치료 받으러 갈 수 없는 이유가 많은데, 그중 하나인 생계비만큼은 1년에 최대 11일까지 서울시가 책임지겠다는 거다.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도입되는 제도라 설왕설래가 많은 듯하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거의 유일하게 상병수당도 없고, 근로기준법상 유급병가도 없는 나라에서 이 정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급병가 제도에 대해 이들은 밥 한 끼, 아이들 학원비라도 보탤 수 있다는 경제적 효과, 그 여유만큼 일을 줄이고 치료에 전념할 수 있다는 건강효과에 대해 언급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맙다’고 했다. ‘마음이 안정되니 일하는 능률도 오를 것’이라며. 이 제도가 생기면 내가 좀 아플 수도 있고 삶을 반추하고 스스로를 위로할 시간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에 ‘참말로 좋겠다’는 이도 있었다. 

그래서 ‘서울형 유급병가’ 제도의 진정한 의미는 하루 8만1180원이라는 금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파도 나와 내 가족을 살리기 위해 일하러 나가는 그들을 우리 사회가 ‘걱정’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메시지, 그렇게 극한까지 일하지 않아도 되고, 너무 아프면 쉬어가도 되고, 우리가 함께 도와주겠다는 연대와 포용의 감정에 있을 테다. 불평등과 양극화, 방임과 학대, 자살이 끊임없이 증가하고 지속되는 이 사회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이런 연대와 희망의 정책들이다.

<정혜주 | 고려대학교 교수·보건정책관리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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