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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에게 ‘엘리트 코스’는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일까? 경향신문 11월25일자 ‘다른 삶’을 읽으며 들었던 의문이다.

그랑제콜이 프랑스 혁명의 중요한 성과이듯, 국립대학 평준화 역시 68혁명의 중요한 성과로 꼽힌다. 물론 엘리트교육기관으로 대표되는 그랑제콜과 대중교육기관으로 대표되는 국립대학으로 분리된 프랑스의 고등교육 체제는 “적어도 (모든 학생이) 입시에 매달려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엘리트가 아닌 대다수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할까?

우선 프랑스가 그랑제콜-국립대학이라는 이원화 체계를 도입한 68혁명 이후 어떤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었으며 교육체계가 이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를 잠시 살펴보자. 68혁명은 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혁명이라 부르기에 무색할 정도다. 이미 1960년대 초반에 시작한 탈산업화로 인한 대량 실업사태가 제1·2차 석유파동을 겪으면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자유주의 시대의 전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서 국립대학 평준화는 더 이상 고등교육 없이 계급상승이 불가능해진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동시에 프랑스는 공교육 서비스의 양적 성장 및 바칼로레아 취득률 80%라는 목표하에 일반계와 구별되는 기술계와 실업계 바칼로레아를 1968년과 1985년에 각각 창설했다. 역설적이게도 국립대학 평준화와 더불어 고등교육을 지속할 의지나 능력이 보이는 학생들을 일찌감치 선별, 격리하는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계열이라는 차이를 서열화함으로써 학생의 향후 진로 및 직업의 선택지를 제한한 것을 뜻한다.

이와 동시에 교육 과정 다양화라는 명목하에 특정한 동네의 일부 학교에만 다국어반, 예체능반과 같은 특수반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이러한 교육 체계를 숙지해 활용할 수 있는 특정 계층에만 혜택이 돌아가는 한편 그렇지 못한 학교의 게토화 현상을 초래했다. 세분화·위계화하는 중등교육 과정에 맞추어 고등교육 과정 역시 같은 길을 걸으면서 국립대학의 의과대학 및 법과대학, IUT(단기 공과대학)처럼 향후 안정적인 취업이 보장된 일부 학과에만 지원자가 몰리고 있다. “국립대만 아니면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다수의 학생과 학부모들은 국립대학 입학을 기피하고 있다. 실업계 바칼로레아를 취득하고 학사 과정에 입학한 학생들이 1년 유급해 4년 안에 학사학위를 취득할 확률은 약 5%에 불과하며, 전체 학생 중 학위 취득률도 60%에 불과하다. 취업과 상관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하는 인문학 학과에 기술계와 실업계를 이수한 학생들이 등록하는 이유는 저소득층 학생을 위한 장학금 등의 혜택을 받으려면 학생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랑제콜에 입학하지 못한 학생들이 사립학교를 선호하면서 학자금 대출 시장, 사교육 시장 역시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에게 어떠한 성찰을 요구하는가?

좌파로 분류되는 프랑수아 미테랑 정권에 들어서 본격화된 공교육 과정 개편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중상위계층 자녀다. 그리고 그들이 압도적으로 많이 입학하는 고등사범학교가 보유한 교육 예산은 학생 한 명당 6만유로, 파리 정치대학은 1만5000유로인 반면 서민층 학생이 다수 입학하는 파리 8대학의 1인당 예산은 6000유로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차별당하고 배제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서민층의 자녀들이며 그중에서도 프랑스 구 식민지 출신 유색인 이주 노동자의 자녀들이다. 그런데도 프랑스 사회는 이들을 프랑스 복지체계의 수혜자라 손가락질하기 일쑤다. 이들에게 그랑제콜이라는 엘리트코스는 (무)능력에 따른 결과나 하나의 선택지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외계다. 한국에서도 저소득층의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이 일반화되고 있으며, 이주노동자 2세가 성인이 되어 대거 노동시장에 진입하는 시점이 곧 다가온다. 이들에게 한국의 교육 체계는 어떤 미래를 제시해줄 수 있을까? 능력주의와 기회의 평등이라는 슬로건이 공정한 게임의 법칙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시기와 맥락은 지나버린 지 오래다. 이제는 게임의 룰뿐 아니라 장(場)을 대체할 이데올로기를 고민할 때다.

<김지영 이주노동자·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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