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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철도노조 KTX 열차 승무지부가 12월21일에 제4회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을 수상했다. 이 상은 1979년 YH무역 노동조합의 생존권 투쟁을 위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다가 경찰의 강제해산 과정에서 21세로 숨진 노동자 김경숙씨를 기리는 상이다.

KTX 열차 승무지부의 해고 승무원들은 2004년 철도청의 자회사에 위탁 계약직으로 입사했던 여성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채용 시 공무원에 준하는 대우 및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던 것과 달리, 계약기간 2년이 만료되자 다른 자회사 소속 계약직으로 재계약할 것을 강요받았다. 부당한 노동조건과 재계약 요구에 맞서 이적을 거부하고 파업을 시도했지만, 정규직 전환 대신 해고를 통보받았다. 투쟁은 11년이 넘게 계속되었다.

이들의 해고 무효소송에 대한 1·2심 판결은 “KTX 승무원과 코레일의 묵시적 계약 관계”를 인정했다. 하지만 2015년에 대법원은 “코레일과 승무원 사이에 직접 근로관계가 성립했다고 단정할 수 없고, 근로자 파견계약 관계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며 원심을 파기환송했다. 이후 “서울고법 민사1부(신광렬 부장판사)는 해고 여승무원 34명이 코레일을 상대로 낸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린 1·2심을 파기하고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경향신문 2015년 11월27일자 보도)

문재인 정부가 여성의 취업 및 노동 조건의 개선을 위해 지난 26일 내놓은 여성 일자리 로드맵을 보며 이 해고 승무원들을 새삼 떠올려본다. 이 정책들은 그 여성 노동자들이 겪었던 부당함을 앞으로 근절할 수 있을까. 문재인 정부의 여성 일자리 로드맵의 세 핵심분야 중 두 가지는 ‘경력단절 예방’ ‘경력단절 후 재취업 지원’이다. 이 로드맵의 대부분은 기혼여성들이 직면하는 경력단절 문제에 대한 지원책이라 할 수 있다. 즉 이 지원책들은 여성의 노동을 결혼과 출산이라는 규범적 틀 안에서 사유한다. 여성이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주체이기 이전에 출산과 육아의 책임자로 설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언제나 저출산 문제의 최종 책임을 여성에게 돌려온 과거 정부들의 정책방향과는 얼마나 다른가.

출산, 육아와 관련된 여성노동의 어려움을 해소하고 경력단절 여성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정책들은 물론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KTX 여승무원들의 경우가 보여주듯 여성들은 취업 문턱에서부터 어려움을 겪고 불평등한 고용 조건에 직면하며 구조적인 저임금, 고용불안정에 시달린다. 그런 점에서 ‘차별 없는 일자리 환경 구축’은 경력단절, 저출산 문제를 고려하더라도 가장 시급한 일이며, 로드맵의 세 핵심분야 중 하나가 아니라 여성 일자리 정책의 포괄적 철학이어야 한다.

성차별 없는 노동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체계적, 지속적인 성평등 교육이 필수적인 과제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과제가 지난할 것은 자명하다. 그래도 일자리 정책과 함께 정부는 분명 성평등 교육의 확대와 심화 방안을 구체적으로 마련해야 하며, 출산과 육아의 틀을 중심으로 여성 노동 문제에 접근하는 시각이 과연 성평등의 이상에 부합하는지 성찰해야 한다. 여승무원들을 ‘철도의 꽃’이라 부르며 서비스 노동에 대거 채용한 코레일은 성별에 따라 직제를 분리하는 성차별적 고용행위를 했으며, 그들의 직분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이들 여성의 노동 가치를 평가절하했고, 위장도급, 비정규직화, 집단해고로써 성차별적 구조조정을 실행했다. KTX 해고 승무원들의 상황은 모집, 채용에서부터 퇴직에 이르는 전 과정에서 노동시장에 만연한 성차별적 사고와 관행의 전형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여성 일자리 정책에는 성차별적 기업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불행히도 이런 정책이 소급될 수는 없을 터이다. 현재 이 해고 승무원들은 밀린 급여 8000여만원을 받았다가 대법원 파기환송 후 회사에 1억여원을 각자 되갚아야 하는 빚으로 떠안고 있다.

해고 승무원들의 지난 4300일은 여성이 소비되고 폐기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고통이 새겨지는 몸을 가진 인간임을 파업, 단식, 삭발, 점거, 고공농성, 오체투지로 보여준 시간이었다. ‘올해의 여성노동운동상 김경숙상’ 시상은 그 고통에 대한 작지만 큰 위로다. 하지만 부당한 외주화와 해고에 맞선 그들의 저항을 무력화한 대법원 판결 후 그 분투가 어떤 결론에 이를지는 불투명하다. 성차별 없는 노동문화를 위한 투쟁은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세상으로 가는 길에 다름아니다. 새해엔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가길 꿈꾼다.

<윤조원 고려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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