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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도처에 변화의 바람이 분다. 정권교체 이후 처음 맞는 새해에 더 많은 변화가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그러나 냉정하게 주위를 둘러보자. 많은 것들이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한반도와 삶, 두 개의 전선에서 우리는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한반도에도, 우리 삶에도 평화가 없다. 새해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뒷받침할 확실한 근거도 없다.

핵무력 완성을 선포한 김정은은 “미국에 실제적인 핵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전략국가”가 되었다고 했다.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강제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예방전쟁이라도 할 태세다. 북한과 미국 모두 전쟁을 원치 않지만 피하지도 않겠다고 했다. 1953년 휴전 이래 정전체제의 불안정성이 요즘처럼 극대화된 적이 없다. 지금 이 평화 없는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핵과 미사일과 전략폭격기와 적대와 불신과 무기력증이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65년째를 맞는 한반도의 새 아침 풍경이다.

전쟁 전야 같은 한반도 정세와 달리 우리 내부는 이미 전쟁 중이다. 낚시 가던 15명은 바다에서, 스포츠센터를 이용하던 29명은 땅에서 피할 수 있었던 재난을 당했다. 지난달 9일 인천에서 크레인이 무너졌다. 세 시간 지나 용인에서도, 9일 지나 평택에서도, 다시 20일 지나 서울에서도 무너졌고 사람이 죽어갔다. 우리는 이게 마지막일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고교 실습생은 작업장에서, 30대 일용직 노동자는 지하철 선로에서 짧은 생을 마감했다. 한국 사회는 무한 반복의 마법에 걸린 시시포스 같다.

슬프지만, 하루하루가 전투인 이 땅에서는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다. 생존경쟁에 밀린 이들이 자신을 살해하는 사회다. 한국에서 자살은 손쉬운 문제 해결책이 된 지 오래다. 오늘 하루 무사했다고 내일도 그러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 전쟁터에는 겨우 생존한 사람, 상처 입은 사람, 희생된 사람들로 넘쳐난다. 청소년은 충분히 잠을 자지 못하고 친구와의 성적 경쟁에 지쳐간다. 젊은이는 포기하는 법부터 배운다. 노인은 가난해지는 것에 익숙해진다. 부는 소수에게 집중되고 불안은 다수에게 확산된다.

한국의 임금불평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미국 다음으로 높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은 미국과 함께 가장 높고 평균 근속연수는 OECD 회원국 중 가장 짧다. 성별, 고용형태별, 기업규모별, 학력별 격차는 너무 크다. 노동의 질과 양 모두가 최악이다. 고용 불안은 불평등을 낳고 불평등은 사회 갈등을 증폭시킨다. 이 모든 갈등이 응집되는 공간이 정치다.

그래서인지 정치는 격렬하다. 정권교체, 다당제도 소용없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여러 정당이 경쟁하면서 협력하고,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미묘함과 섬세함 같은 것은 없다. 정쟁은 살기를 띤다. 

먼 옛날 수렵채취인은 낯선 사람을 만나면 죽이려고 했다. 먹을 게 부족한 상황에서는 타인을 적으로 간주하는 게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우리 삶이 바로 수렵채취시대를 닮았다. 사회의 주요 집단은 사회적 합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기적 욕망에 충실하다. 여야는 일치하는 의견이 하나도 없는 듯이 죽자 사자 대결한다. 대기업은 중소기업과 상생 기반이 없는 것처럼 약탈적 행동을 한다. 노사는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대화가 불가능한 것처럼 대치한다. 사람들은 가족을 제외한 모두를 잠재적 경쟁자처럼 대한다.

사회적 합의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여야는 같은 내용의 공약을 경쟁적으로 발표하고 그걸로 표를 모았다. 소방공무원 증원, 아동수당 및 기초연금 인상은 44개 공통 공약의 일부다. 그러나 2018년 예산 심의 때 여야는 이 문제를 놓고 크게 대립했다. 그동안 여야는 합의 부재 때문에 싸운 것이 아니라, 합의에도 불구하고 싸웠던 것이다. 차이·갈등은 무죄다. 문제는 합의를 쓸모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차이와 갈등을 대결의 도구로 동원하는 데 있다. 차이는 적대할 이유가 아니라 대화와 설득이 필요한 이유를 말해줄 뿐이다. 갈등 역시 화해불가능성을 뜻하지 않는다. 차이가 합의를 무너뜨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러자면 경계를 넘는 대화가 필요하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잠재적 합의를 발견하고 확장해야 한다.

오늘의 현실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할 이도, 완전히 책임을 면제받을 이도 따로 없다. 한동안 사회를 지배했던 강력한 신념, 즉 위험의 외주화가 합리적이라던 신자유주의로부터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 복지 확대, 탈원전, 노동 문제도 비용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게 아니라 각자 자기 몫을 분담하는 방식으로 풀어가야 한다.

어떤 이들은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대화, 연대, 관용, 합의 같은 평화적 방법이 별 쓸모가 없다고 주장한다. 힘의 사용, 즉 강제력의 동원이 보통의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잘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회적 현안에 권력이 적극 개입하고, 북한 핵·미사일 위기에 전쟁할 각오로 나서야 한다고 요구한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번영과 평화의 한가로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든다고 했다.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는 클라우제비츠의 격언에도 우리는 매우 익숙하다.

정말 평화는 문제 해결에 별 쓸모가 없는가? 사회 불안과 갈등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평화가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북한과 한·미는 60년간 전쟁 준비를 했지만 평화가 온 것이 아니라 전쟁이 다가왔다. 부족했던 것은 전쟁 준비가 아니라 평화 준비였다. 평화는 그저 귀에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사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이자 현실적 해결책이다.

독일 경제학자 베르너 귀스는 1982년 흥미 있는 실험을 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주는 간단한 실험이다. 가진 돈 전부를 줄 수도 있고, 아주 조금 줘도 상관없다. 여러 팀의 실험 결과, 50%의 몫을 준 사람의 수가 가장 많았다. 받는 쪽은 몫이 30% 이하면 받지 않았다. 인간은 합리적이고 이기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인간은 공정성을 중시했다. 실험을 약간 바꿔봤다. 다른 점은 실험 참가자에게 ‘시장게임’이라고 말해준 것뿐이다. 주는 쪽은 아주 적은 액수를 주었다. 받는 쪽도 거절하지 않았다. 한 푼도 안 받는 것보다 적은 돈이라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회는 시장논리가 지배하는 무한 경쟁 체제라고 인식되자 상대가 이기적인 행동을 할 것으로 예측하고, 자신도 그에 맞게 반응한 결과다. 이번에는 유치원생과 초등학생 비교 실험을 했다. 유치원생들은 적은 돈을 주고 이를 받아들였지만, 초등학생들은 적은 돈을 주는 비율도 낮았고 잘 받지도 않았다. 이 차이는 초등학생이 공정성과 배려라는 사회적 학습을 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일련의 실험이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다. 시민은 사회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 따라 행동한다는 점이다. 이를 시민-사회 관계에 관한 두 개의 순환 고리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시민이 ‘사회는 이기심이 지배하는 생존 경쟁의 무대’로 여기고 그런 인식 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민과 사회는 서로 이기적 성향을 부추긴다. 다른 하나는 시민이 ‘사회는 협력이 지배하는 공존의 무대’로 인식하고 그에 맞춰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민과 사회는 서로 협력적 경향을 강화한다. 무한 경쟁 사회는 상상의 산물이다. 고정불변이 아니다.

어떤 것은 바꿀 수 있지만, 어떤 것은 바꿀 수 없다고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이미 우리가 바꾼 것은 한때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감수해야 할 불가피한 운명, 거부할 수 없는 질서라는 것은 없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사람이 인권을 타고났다는 오랜 믿음이 허구라고 했다. 인간을 포함한 생물에게는 당초 권리라는 것이 없다. 그게 있다면 타조는 날 권리를 타고나야 한다.

어떤 질서를 따르는 것은 그것이 객관적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협력해서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가치·이념·제도는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가치·이념·제도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기존 질서가 초래한 불안과 위험 때문에 행복하지 않다면 왜 바꾸려고 하지 않는가? 정부를 바꾸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회를 바꿔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바꿔서 사회를 바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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