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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 동명대 교수·언론광고학
27세의 홍안(紅顔), 이준석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20일자)에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인 과반의석 점유로 당이 혼란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여당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총선 결과였던 게다. 후폭풍이 당연하다. 진보적 유권자 상당수가 4월11일 늦은 밤,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치허무주의라는 유령이 대한민국 하늘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KTX 민영화가 들먹거리고,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는 언론의 의제설정에서 완연 사그라드는 추세다.
정치평론가들의 4·11 총평을 요약해보면 대략 세가지다. 첫째는 ‘차려준 밥상도 못 먹는’ 민주통합당의 무능이다. 밥상을 통째 걷어차고 바닥에 흘린 밥 알갱이나 주워 먹은 꼴이다. 갈라먹기 공천의 절정은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 유종일 교수의 공천 탈락이었다. 둘째는 “선거의 여왕의 저력”이다. 오른손에 휘감은 붕대로 상징되는 정교한 이미지정치가 부동층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선거 중반 이정희 의원 사퇴와 종반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이다. 일리있는 해석들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새누리당 압승 원인의 전부일까?
투표는 특정한 정치·경제·사회 정책을 주장, 실천하는 정당과 후보자에 대한 공감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앞선 분석들은 혹시, 유권자들 표심을 일시적 화장빨에 현혹되는 즉자적 선택 결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19대 총선 투표일인 11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 주민센터의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이 줄을 서있다. I 출처:경향DB
정치 문외한인 필자 생각에 막강한 의회권력을 선출하는 역사적 선택에서 초(超)보수 정당이 대대적으로 승리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유권자들 스스로가 초보수적이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 민간인 불법사찰, 재벌경제 고착화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이 다수당 등극의 축포를 터트리는 현상에는 우리나라 유권자들 인식이 꼭 그만큼이라는 구조가 깔려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뚜렷한 인과관계에 애써 눈을 감는 건, 우리 사회가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는 무조건 옳다’라는 집단최면 말이다.
총선 다음날 새벽, 잠자리에 든 필자의 비몽사몽 위에 겹쳐진 것은 1932년의 독일이었다. 그해 7월31일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은 37.3%의 압도적 지지율로 제국의회 선거를 장악한다. 그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사민당의 지지부진한 절차민주주의에 짜증을 내고 히틀러의 경제성장 마술에 현혹된 보통의 독일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유권자의 위대한 선택’을 통해 탄생한 나치 정권이 이후 어떤 길을 걸어갔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국회의원 선거보다 몇 배 중요한 또 다른 선거를 앞둔 지금, 우리 정치의 키워드는 민주당의 무능도 새누리당의 꽃단장 제스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눈앞에 꿈틀대고 있음에도 모두가 외면하는 그 괴물의 정체는, 바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넘어선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우중화(愚衆化)인 것이다.
후손에게 물려줄 강산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4대강 사업도, 헌법민주주의의 기초를 부수는 민간인 불법사찰도 모두 남의 일이라 여기는 극단적 개인주의. 민혁당 관련자 사법살인으로 상징되는 유신독재의 공포를 못 사는 이들도 살 만했던 호시절로 대체하는 기억상실증. 이 ‘숨은 손’들이 모여 허황무비한 7·4·7공약에 박수를 쳤고, 돈 놓고 돈 먹기식의 뉴타운공약에 몰표를 던졌던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손들이 8개월 뒤에 다시 붓뚜껑을 들 것 아닌가.
가혹한 경제불황의 고통을 원인제공자인 기득권력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기보다는, ‘무능해보이는’ 개혁세력에게 되돌리는 착종적 인식과 유권자들의 집단무의식 저변의 이 같은 퇴행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을 번쩍 깨울 수 있는 혁명적 정책 대전환이 시도되지 않는 한, 남은 대선 또한 민주개혁 진영에는 전도무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80년 전의 독일을 2012년 12월 이 땅에서 다시 만나는 데자뷰, 상상만 해도 등에 소름이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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