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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채’는 여전히 한국의 유효한 신입사원 채용 방식이다. 언론사도 그렇다. 어떤 부서를 다녔는지를 보여주는 경력과 함께 ‘○○년에 입사한 ○○기’가 나의 정체성으로 줄곧 따라다닌다.

그 ‘공채문화’의 상징과 같은 것이 수습기자 교육이다. 3~6개월 동안 경찰서의 지저분한 기자실에서 하루 2~3시간 ‘쪽잠’을 자면서 밤늦도록 사건 현장과 경찰서를 돌아다니면 육체가 너덜너덜해진다. 하루 종일 ‘1진’이라 불리는 선배에게 보고하면서 빠뜨리고 놓친 부분을 수없이 지적당하면 영혼도 너덜너덜해진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혹독함 때문인지 과거 경향신문 수습기자를 취재하러 왔던 한 방송사의 다큐 프로그램 이름은 <극한직업>이었다.

극한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을까 종종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름의 결론은 다음 2가지였다. 주어진 일을 주어진 시간 안에 어떻게든 마무리해내는 능력과 그 누구에게, 뭐든 물어볼 수 있는 용기를 습관처럼 장착하는 것. 마감을 지키고 막힘없이 취재할 수 있는 것은 기자로서 일해나가기 위한 기본 중의 기본이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기사를 잘 쓸 수 있는 교육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는 얘기기도 하다. 연습기사가 시뻘겋게 되도록 ‘빨간펜’을 당했지만 빨간펜의 목적은 대개 기사를 특정한 형식으로 잘 정리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렇게 수습교육을 마치고 나면 모두가 파도에 잘 깎인 몽돌처럼 몇 가지 정형화된 기사에 익숙해졌다.

이건 종이신문을 제작하기 위해 최적화된 방식이기도 했다. 지면을 이리저리 갈라 한정된 분량만큼 기사를 넣어야 하니 기사는 무엇보다 ‘경제적’이어야 한다. 기사의 주제가 뭔지 가장 먼저 알려주고 핵심 팩트만 골라 압축해야 했다. 맥락과 전후 상황에 배려할 공간은 없었다. 기자의 주관은 금기시됐으며 그마저도 모두 발라냈다. 말 그대로 뼈만 남는다.

그런데 이제 독자들은 이런 기사가 불편하고 불친절하다고 말한다. 기자가 일방적으로 팩트의 중요도를 매겨 나열해놓고 맥락이 제대로 담기지 않으니 기사는 물 흐르듯 이해되지 않는다. 기자의 관점도 없으니 건조하기 짝이 없고 정작 사안을 어떻게 봐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접근이 어려운 팩트를 발굴해내는 것은 여전히 기자의 경쟁력이지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팩트를 잘 정리하는 능력은 더 이상 경쟁력이 아니다. 팩트를 잘 정리하고 맥락과 관점까지 제시하는 좋은 글은 기사 말고도 많다.

기사를 선명하게 쓰기 위해 무리하게 주제를 뽑아 단정하는 일이 때로는 ‘폭력적’일 수도 있다. 세상일이 그렇게 무 자르듯 재단되지 않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재단되지 않는다면 재단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사를 써야 한다. 사실 독자들은 신문이 ‘낡아서’ 안 보는 것이 아니라 기사가 ‘낡아서’ 안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임직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임원 회의에서 파워포인트는 금지’라는 원칙을 강조했다. 회의에서는 파워포인트 대신 모두가 자신의 관점과 완결된 이야기를 담은 6장짜리 메모를 준비해 발표해야 한다. 일목요연한 파워포인트를 아무리 만들어도 회사에는 도움이 안된다는 얘기다.

올겨울에도 여전히 많은 수습기자들이 경찰서를 헤맬 것이다. 언론사의 수습교육 관행은 많이 달라졌다. 경향신문 수습기자들도 더 이상 경찰서에서 숙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늘 써오던 기사 작성법을 가르치던 교육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미디어의 콘텐츠가 바뀌려면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지만 선행돼야 할 것 중 하나가 기자 교육을 바꾸는 일이다. 수습기자들이 배워야 할 것은 팩트를 잘 정리하는 ‘기술’이 아니라 맥락과 관점을 담을 수 있도록 생각하는 법이다.

<이인숙 뉴콘텐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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