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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사를 하면서 책 수백권을 정리했다. 책장에 두 겹으로 꽂아놓고도 모자라 종이 박스에 담아뒀던 책들을 이사하는 김에 떠나보냈다. 중고서점에 팔 수 있는 책들은 팔고, 그렇지 못한 책들은 기부했다. 이도저도 아닌 것들은 재활용쓰레기장에 내놨다.

읽지도 않을 책을 먼지가 쌓이도록 모아두는 오랜 악습을 갖고 있었다. 아내는 이사를 기회로 악습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용품이 늘어나면서 내 책을 놓아둘 공간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밌게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책장을 펼칠 일이 없다는 판단이 들면 택배 박스에 넣었다. 도저히 버릴 수 없는 책들은 아이 핑계를 대고 남겨뒀다. 아내에게 “언젠가 아이들이 봤으면 하는 책들”이라고 했다. 아내는 “아이들이 글자를 깨우칠 때쯤이면 종이책이란 매체가 사라질 것”이라며 더 과감한 선택을 요구했지만, 나는 “그래도 1000년 이상을 버텨왔는데 그리 쉽게 사라지겠냐”며 버텼다. 다행히 이사를 한 뒤에 책장 1개는 채울 만큼의 책이 살아남았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최근 내게 힘을 실어주는 보도가 나왔다. 호주와 미국 연구진이 책을 집 안 가득 쌓아놓는 것만으로도 지적 능력을 높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이다. 지난 17일 서울신문이 보도한 이 연구결과에 따르면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도 집에 책이 쌓여 있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지적 능력이 향상될 수 있다. 또 집에 책이 많이 있는 것만으로도 교육 성취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사회학 및 통계학 분야 국제학술지 ‘사회과학연구(Social Science Research)’에 실렸으니 얼렁뚱땅 진행된 연구도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성인역량조사(PIAAC) 데이터 5년치를 분석했다고 한다. 31개국 성인 남녀 16만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 중 ‘아동기와 청소년기에 집에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와 ‘시험 결과’를 비교해보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집에 책이 많은 분위기에서 자란 성인들은 언어 능력, 수학 능력, 컴퓨터 활용 능력이 뛰어났다. 학창 시절 학업성적도 집에 있는 장서의 규모와 비례했다. 반면 책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자란 성인들은 읽고 쓰는 문해력, 수리력, 컴퓨터 활용 능력이 평균 이하로 나타났다. 특히 고소득층 가정보다 저소득층 가정에서 책이 하나씩 늘어나는 것이 학업 성적 향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규 교육은 제대로 받지 못했더라도 책으로 둘러싸인 집에서 자란 10대 청소년들은 책이 별로 없는 환경에서 자란 대학 졸업생만큼이나 지적 수준이 높다는 것을 확인했다”는 연구진의 설명도 있었다.

사실, 책이 존재 자체로 공부를 시켜주지는 않는다. 책을 만드는 종이나 잉크에서 뇌를 활성화시키는 물질이 분비되는 것도 아닌데 책을 근처에 쌓아둔 것만으로 문해력이나 수리력이 늘어날 리가 없다. 짐작컨대 저런 결과를 초래한 가장 큰 이유는 ‘책 읽는 분위기’가 아닐까 싶다. 집에 책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의 공간과 비용을 책에 할애했다는 의미다. 그런 부모가 책을 적게 읽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저소득층 가정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없는 살림에 책을 사는 사람이라면 더 열심히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집에서 자란 아이라면 손쉽게 책읽는 습관을 들일 수 있다.

나같은 사람들에게는 다시 책을 쌓아둘 명분이 생겼다. 다만 앞으로는 책을 쌓아두기만 해서는 안된다. 아이들 앞에서 책을 읽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지난 2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17 국민독서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독서율은 1994년 이후 최저를 기록했다. 성인은 책 읽기가 어려운 이유로 ‘시간이 없다’ 다음에 ‘휴대전화, 인터넷, 게임’ 등을 들었다. 학생은 ‘시간이 없다’ 뒤로 ‘책 읽기가 싫고 습관이 들지 않아서’라고 답했다. 한국에 사는 성인으로서 뒤통수가 따갑다.

<홍진수 문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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