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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패션에 관심은 많은데, 정작 입고 다니는 옷은 거의 똑같아 보인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에서 일하다가 지난해 한국에 정착한 어느 프랑스인 패션 디자이너가 최근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사 댓글을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관심은 많다. 다만 내 옷보다 남이 뭐 입었는지 관심이 많을 뿐이다.”

한국식 ‘똑같은’ 패션의 정점인 ‘김밥 패딩’을 입는 겨울이 오고 있다. 기후이변으로 북극 얼음이 많이 녹아 올해도 제트기류가 한반도로 흘러내려올 것이라고 하니 이제 겨울철 롱패딩은 ‘생존템’ 내지 ‘국민복’으로 자리 잡을 듯하다. 롱패딩을 남과 다르게 개성 있게 입기는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혹한에는 그저 애벌레 고치 짓듯 껴입는 게 최고다. 하지만 아주 조금, 남과 똑같은 복장이 ‘몰개성’의 증거가 아닌지 마음 한편이 불편해지곤 한다.

개인주의는 각각의 고유한 개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남과 똑같은 것은 미덕이 아닌 게으름이므로, 자기만의 특질을 가꿔야 한다. 그런데 한국은 개인주의보다는 집단주의가 더 두드러지는 사회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명제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를 분석한 장한업 이화여대 교수의 저서 <차별의 언어>에 따르면 한국어에는 유독 ‘우리’라는 표현이 많다. 엄마, 집, 회사 같은 단어 앞에 ‘나’가 아닌 ‘우리’가 붙는다. ‘우리’는 ‘울타리’와 어원이 같다. 나와 같은 울타리 안에서 정체성을 공유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한국인들은 유독 민감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패션은 ‘개인’보다는 ‘집단’의 동질감을 확인하는 소소한 의식처럼 보인다. ‘개성만점 에지 있는’ 유행 패션을 함께 소비하면서 한 사회 안에 연결된 너와 나를 확인하는 것이다. 쨍한 빛깔 등산재킷 차림의 단체관광객, 체크남방에 뿔테안경 쓴 공대생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직장 여성들이 ‘복제 패션’의 ‘유머짤’로 소비되곤 하는데 사실 다들 크게 다르지 않다. 약간의 변주만 있을 뿐이다. 김밥 패딩의 경우 허리선을 강조하거나, 라쿤이나 여우 같은 동물의 털을 달거나 하는 정도다.

이렇게 모두가 한꺼번에 소비 축제에 뛰어들면 회사의 명운이 바뀌기도 한다. 스포츠용품 업체 ‘휠라’는 국내 10~20대 소비자들 사이에서 2~3년간 크게 유행하면서 기울던 사세를 한 방에 역전시켰다. 김밥 패딩이 스트리트 패션에 밀려 고전하던 아웃도어 업체들의 둘도 없는 효자가 된 건 잘 알려진 얘기다.

군중의 소비를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널리스트 마이클 본드는 <타인의 영향력>에서 ‘군중심리’라고 하면 중심 없이 휩쓸리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보다 순기능을 가질 때도 적잖다고 지적한다. 기본적으로 인간의 뇌는 타인과 연결되고 소통해야 제 기능을 하도록 설계돼 있다. 나와 상대방이 같은 취향을 갖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패션은 즉각적인 소속감을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한국처럼 내수시장이 그리 크지 않은 곳에서 ‘개성 넘치는’ 스타일의 차별화되는 제품은 추가 비용이 들어간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볼 때도 비슷비슷하게 입는 게 이득인 셈이다.

다만 똑같이 입더라도 똑같은 사고를 하지는 않는다는 걸 서로 이해할 상상력이 있다면 모두가 사시사철 ‘김밥 패딩’ 같은 옷을 입더라도 별로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애플의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는 검은색 터틀넥에 청바지, 뉴발란스 운동화 패션만 고집했지만 누구보다도 창의적인 인간이었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무궁무진하고 패션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고유한 서로를 마주하기 위해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복장을 넘어 나와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타인의 삶에 귀기울이는 ‘환대’의 마음만 가지면 된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당신은 지금 입고 있는 옷 이상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머금은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민영 산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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