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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초 사립유치원 비리 문제가 불거졌을 때 시급히 해야 할 일 중 하나는 전문가 확보였다. 교비로 명품 사고 아파트 관리비 내고, 있지도 않은 ‘가장거래’로 설립자 뒷주머니만 채우는, 일부겠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사립유치원들을 한때 유치원 자녀를 둔 학부모로서 욕만 할 게 아니라 실제로 뭐가 문제고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기사를 쓰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희한했다. 생각보다 전문가라 할 만한 이들과 통화하기가 어려웠다. 대학입시나 사학비리, 사교육 문제 등과 관련해선 논리정연함으로 여론몰이를 능숙히 해대는 교육단체들도 사립유치원 문제에 대해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했다. 교수들은 입 열기를 조심스러워하거나 피상적 말을 늘어놓았다. 어렵게 인터뷰에 응해주기로 한 대학교수는 결국 “못하겠다”고 했다.

정부 정책이 마음에 안 들면 집단휴업 등으로 어깃장을 놓고, 유리한 입법을 위해선 로비도 서슴지 않는 사립유치원 단체의 영향력이 무서워서였을까 생각했던 것은 순진함이었다. 그보단 유아교육 전문가라 불릴 만한 분들이 의외로(?) 없다는 게 더 정확했다.

아동학을 전공한 어느 분도 “국내엔 유치원 전문가가 거의 없다”고 토로했다. 정책의 방향에 대해 코멘트해줄 만한 전문가라면 “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십년간 초등교육의 귀속 분야로서 유아교육이 다뤄지면서 국가가 맡아야 할 기본 교육에 사인(私人)이라는 시장논리가 자리 잡아 오늘까지 이르렀기 때문이다.

[김용민의그림마당]2018년10월26일 (출처:경향신문DB)

사립 초·중·고교와 달리 개인이 임대건물만 있으면 유치원을 차릴 수 있는 현 구조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 유아교육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비롯됐다. 원장 기준에 대한 자격도 남발됐다. 그동안 툭하면 사립유치원들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며 집단휴업 등으로 실력행사를 했지만 그럴 때마다 유력 정치인까지 합세해 정부에 “좀 봐달라”고 개입했다. 사립유치원들의 이기심과 정부의 무관심, 정치권의 부적절한 개입이 ‘형식은 교육기관인데 내용은 자영업’인 형태의 사립유치원 구조를 만들어낸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행정에서 유아교육은 ‘귀찮은 존재’ 정도로 여겨져왔다. 각 교육청의 조직도만 봐도 알 수 있다. 17개 시·도 중 유아교육이 ‘과’ 단위로 조직된 곳은 서울·경기·부산·대구 등 몇 곳 안된다. 초등교육과 내 유아교육팀으로 분류돼 있는 곳도 적지 않다. 서울시교육청도 2013년에서야 관련 팀을 유아정책과로 승격했다. 한마디로 유치원은 ‘돈 있으면 보내고 안 보내도 그만’이라는 30~40년 전 시각에서 진일보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육부 관료조차 “유아교육과로 가게 되면 물먹는 것이란 인식이 많다”고 토로했다.

사회 전체가 유아들의 삶과 권리에 무관심해왔다는 점에서 학부모들도 이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개발 위주, 결과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오면서 내 아이만 불이익받지 않으면 유치원이 어떻게 돌아가든 관심 없어하긴 나도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촉발시킨 실시간 정보공유와 대응은 학부모들로 하여금 과거와는 다른 여론 형성을 가능케 하고 있다. 나 하나 달라져서 세상이 바뀔까 하고 심드렁했던 부모들은 이제 아이 손을 잡고 거리로 나선다. 민심 변화는 19대 대선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국공립 단설유치원 신설을 자제하겠다”고 발언했을 때부터 감지됐다. 그는 사립유치원의 표는 얻었을지 몰라도 그보다 훨씬 많은 학부모들의 표는 얻지 못했다.

‘나 하나 꽃 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냐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꽃 피고 나도 꽃 피면/ 결국 풀밭이 온통/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 시인의 이 작품은 공교롭게도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가 2012년 대선 출마 당시 정치적 포부를 드러내며 인용한 시다. 그가 말한 꽃이 ‘유아교육의 공공성’은 아니었겠지만서도 현재 국민의 꽃은 하나씩 하나씩 피어 꽃밭을 만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문주영 정책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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