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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부정한 청탁을 받으면 법원에 신고하고, 법정 밖에서 변호사와의 의심스러운 만남도 금지한다.’ 최근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내놓은 전관예우 개선 방침이다. 행정처가 내놓은 시원스러운 대책에 여론은 나쁘지 않다. “지금까지 법원·검찰이 내놓은 방안 가운데 가장 강도 높은 것” 등 호평하는 기사도 이어진다.

하지만 그간 법원 내 상황을 돌아보면 마냥 행정처에 박수를 칠 수만은 없다. 정운호 네이처리퍼블릭 대표의 법조 로비 사건이 터지기 전이었던 지난 4월초, 행정처는 사법행정에 반영하겠다며 일선 판사들의 의견을 모은 적이 있었다. 당시 법원 내부망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제시됐는데, “전직 법원장 등 전관이 판사들에게 전화해 법정 외 변론을 하려 할 때 신고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재판의 독립에 관한 것으로 눈에 띄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행정처가 상정한 안건에는 이런 내용이 빠졌다. ‘합의부 내부의 바람직한 문화’, ‘법관의 여가와 휴식을 보장하는 문화’ 등이 주된 안건이었다. 일부 판사들은 “민감한 문제들을 피해 비교적 온건한 안건을 다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며 아쉬워했다. 그런데 얼마 뒤 정 대표 사건이 터지자 행정처는 앞서 제기된 의견과 유사한 아이디어로 전관예우 개선 방안 소개에 나섰다. 외면된 의견을 뒤늦게 ‘재활용’한다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역대 전관예우 논란 고위 공직 후보자_경향DB

사실 행정처가 당초 전관예우 개선 의견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 자체를 비판하긴 힘들다. 사안의 중요성을 판단하는 데는 다양한 시각이 있다. 하지만 행정처는 그간 판사들의 의견을 반영하겠다며 정작 안건 결정권은 처장 중심으로 독점하고 있었다. 이 같은 수직적인 의사결정 구조에서 전화변론 금지 같은 파격적 의견들이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전관예우 개선을 위한 법원의 행보는 분명 의미 있고 지지할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개혁은 ‘정운호에 의한 강제개혁’에 가깝다. 타의에 의한 강제개혁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법원 스스로가 변해야 한다.


박용하 | 사회부 yong14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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