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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한 해의 끝에 도달했다. 매년 이맘때면 미필담(美筆談) 문학 파티를 연다. 미필담은 내가 부산에 내려와 마련한 소설 창작과 담론 연구 소모임이다. 소설 창작자이자 연구자로 살아오면서 축적한 경험을 공유하는 의미에서 출발한 것인데, 10년이 되어간다. 미필담에서는 소설을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한다. 세미나실에서, 카페에서, 도예 아틀리에에서, 포구에서, 풀밭에서 3시간 동안 소리를 나누어 소설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간다.

지난 2년 동안 미필담에서는 방학마다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낭독했다. 매주 3시간씩 모여 소리 내어 읽었는데, 두 번의 여름과 겨울이 지나갔고, 11권 중 2권에 도달했다. 어떤 설명도 없이 그저 목소리를 나누어 읽어갔을 뿐인데, 3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행복감이 번져 충일한 얼굴들이다.

소설은 변화하는 사회 양태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장르이다. 20세기의 소설가에게는 소설 쓰는 일이 소명의식의 실천, 곧 천직이자 업(業)의 발현이었다. 이때 소설은 예술(작품), 사상(철학)의 의미가 컸다.



21세기의 소설가는 여느 직업 종사자와 다르지 않는 생활인의 양상을 띤다. 소설이라는 상품을 생산하는 제작자의 개념이 우세해졌다. 예술 작품과 상품 사이를 오가는 소설의 속성을 돌아보며, 블룸즈버리라는 문학공동체를 통해 작가 활동을 했던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떠올린다. 이 소설은 작가의 이타적인 태도가 깊게 투영된 작품이다.

<댈러웨이 부인>은 여주인공 클러리사가 저녁 파티를 위해 꽃을 사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해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다. 그녀에게 파티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녀는 ‘하루를 보내면서 받은 피로와 상처를 위로해주고 훈훈한 미소를 나누는 화합의 장(場)을 마련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졸저, <파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곧, ‘타인의 행복과 더불어 나의 기쁨을 구하는 것.’ 소설에서 하루라는 시간은 클러리사가 파티를 준비하는 아침부터 파티가 끝날 때까지의 12시간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30년의 세월을 오가는 회상의 여정이다.

한 해를 마감하며 클러리사처럼, 미필담 문학 파티를 위해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한다. 이날만은 3시간 소설 읽기에 음식을 만들고 나누기가 더해져 6시간을 훌쩍 넘긴다. 소설과 인접 장르의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올해에는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 <코뿔소>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읽고, ‘기만에서 깨어나기’라는 특강이 준비되어 있다. 미필담처럼 전국에는 순수 문학공동체들이 있다. 1박2일 한 작품을 밤새워 소리 내지 않고 함께 읽는 묵독 모임이나 느리게 읽어가는 슬로 리딩 모임, 도시 속의 오아시스처럼 방 한 칸을 열어 놓고, 낯선 타인이지만 문학을 매개로 몇 시간 자기 서재처럼 머물며 읽다 가도록 예약제로 무료 제공하는 공간도 있다.

새해를 앞두고, 소박하나마 문학으로 함께 살아가려는 애틋한 마음들을 되새겨본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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