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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17일, 클리블랜드 유격수 레이 채프먼이 야구공에 맞아 사망했다. 뉴욕 양키스의 옛 홈구장 폴로그라운드에서 열린 경기였다. 양키스 투수 칼 메이스가 던진 공이 타석에 있던 채프먼의 머리를 강타했다. 채프먼은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12시간 뒤 세상을 떠났다. 140년 메이저리그 역사상 경기 중 사고로 선수가 사망한 유일한 사건이었다.
야구는 위험한 종목이다. 명예의전당에 오른 야구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야구란 무엇인가>의 첫 문장을 ‘두려움(Fear)’이라는 한 단어로 시작했다. 140g짜리 야구공은 한 손으로 갖고 놀기 편하지만, 150㎞ 넘는 속도로 날아가는 순간 무서운 흉기로 변한다. 그 공을 받는 포수는, 그래서 두꺼운 가슴보호대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를 쓴다. 공을 받는 글러브(미트, mitt)도 손을 보호하기 위해 두껍다.
채프먼이 사고로 세상을 떠났지만 타자들은 여전히 ‘헬멧’ 대신 모자를 썼다. 메이저리그는 선수들의 머리를 보호하는 정책을 도입하는 대신, 투수의 ‘스핏볼’을 금지시켰다. 그때 투수들은 공에 침이나 끈적이는 물질을 발라 던졌다. 손에서 잘 미끄러지게 하거나, 거꾸로 손가락의 마찰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스핏볼에는 먼지나 흙이 잘 묻었다. 공이 지저분하면 타자들이 잘 안 보여 피하기 힘들다는 게 스핏볼을 금지시킨 이유였다.
헬멧은 20년이 지난 1941년이 돼서야 나왔다. 1941년 내셔널리그는 스프링캠프에서 새 헬멧을 시험했는데, 선수들이 이를 꺼렸다. ‘무거운 모자’를 쓰면 스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1950년대 중반, 피츠버그 단장이었던 브랜치 리키가 선수들에게 플라스틱으로 만든 헬멧을 씌웠다. 당시 광부들이 쓰던 것과 비슷했다. 덜 무거우면서도 머리를 보호할 수 있었다.
머리를 가리는 것만으로 안전하지 않았다. 관자놀이와 귀 근처를 가리는 ‘귀 가리개’는 여전히 선수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공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게 이유였다. 메이저리그가 귀 가리개 포함, 헬멧을 의무화한 것이 1983년이었다. 타자들이 헬멧을 쓰는 데 걸린 시간은 63년이었다.
지금은? 많은 선수들이 아예 턱까지 얼굴 반을 가리는 ‘검투사 헬멧’을 쓴다. 공이 안 보이고 거추장스럽기는커녕, 오히려 안전함을 느끼니까 더 적극적인 스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50㎞ 강속구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의지나 근성이 아니라 ‘헬멧’이다.
2020년 봄, ‘마스크’는 우리 삶의 헬멧이다. 거추장스럽고 잘 안 보이고 그래서 불편하지만 우리 삶을 안전하게 만드는 장치다. 헬멧은 63년이 걸렸지만 마스크는 곧장 일상이, 뉴노멀이 됐다. 코로나19를 극복하는 것은 구호나 의지가 아니라 스스로 지키는 생활방역, 손씻기와 마스크다.
테드 창의 소설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 다큐멘터리>는 칼리아그노시아 시술로 심미적 실인증을 일으켜 외모 불평등을 상쇄하는 세상의 이야기다. 건강을 지키는 마스크의 또 다른 효용 가능성. 가린 만큼 덜 보인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폐해, 외모 지상주의를 완화시키는 효과도 있(다고 믿는)다.
<이용균| 스포츠부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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