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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프랑스의 사상가 장 보드리야르는 <아메리카>에서, 강인한 신체에 몰두하는 미국 사회의 욕망을 읽었다. 이유 없이 뛰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는 프랑스의 사상가가 보기에 ‘뉴욕 마라톤은 물신주의적이며 공허한 승리의 망상’이었다. 레이건의 애국주의가 지배하던 때였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나는 해냈다’고 외치는 1만여명의 마라토너에게서 강력한 물신주의를, 그리고 피트니스센터에서 뛰는 사람들에게서 ‘창백한 고독’을 읽었다.

글쎄, 우연히도 나는 1995년 11월, 센트럴파크에 있었다. 뉴욕 마라톤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대회가 시작된 지 예닐곱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내가 본 주자들은 매우 느린 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노인도 있었고 휠체어 장애인도 있었고 엄마 손을 잡고 걸어오는 아이도 있었다. 그들의 환한 표정에서 ‘물신주의’나 ‘고독’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센트럴파크 곳곳에서 울려 퍼지는 ‘우린 할 수 있다’는 캠페인도 한편 압도적인 미국의 상징일 수도 있지만 시민들의 소박한 성취에 보내는 따스한 찬사로 들렸다.

한 개인의 신체 활동은 스스로의 건강과 즐거움을 위한 것이지만 동시에 집합적 사회 행위다. 특히 큰 사태를 겪고 나면 사람은 자신의 신체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는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미국 사회에서 ‘강인한 신체 신드롬’이 크게 유행했듯이, 사태의 한복판에 뚫고 나온 자신의 몸,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에서 서서히 벗어나게 된 자신의 육체, 마침내 신선한 공기 속으로 걸어가게 된 자신의 신체에 대하여, 사람들은 더욱 사랑하게 된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1997년의 외환위기 이후가 그 증거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냉혹한 현실을 공포스럽게 경험한 이후 사람들은 마라톤을 하게 되었고 산악자전거를 타고 가평의 험준한 대부산에서 유명산으로 달렸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마도, 현재 우리 모두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5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하여 짓눌렸던 몸과 마음의 긴장을 털어내기 위해 야외 활동을 많이 할 것이다. 그때, 5월의 따스한 봄바람을 즐기며 걷거나 달릴 때, 더불어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게 있다. 한 개인의 건강한 신체도 중요하지만 이 사회 전체가 건강한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사태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지금, 우리 사회는 미증유의 혼란 속에서도 비교적 차분히 소박한 일상을 견지하면서 나름대로 우애를 나누고 있다. 사태의 종식 이후, 우리가 더욱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연대다.

그것의 실질적인 구현에 있어 스포츠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물론 극히 개인적 차원에서 신체를 보다 더 건강하게 단련하면서 미증유의 사태를 벗어났다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 전체가 그러한 마음 상태를 온전히 공유해야 한다. 아픈 사람, 약한 사람, 뒤처진 사람을 서로 돌보고 배려하는 사회 관계망의 재구성! 바로 그 소중한 일상성의 회복에 스포츠는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다. 전국에 수많은 인프라가 있고 스포츠 전문가가 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가치를 국가 정책을 통해 구현하겠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21대 총선에 임하는 주요 정당의 정책을 보면, 스포츠 정책은 대부분 후순위로 밀려 있고 그것도 오래된 자료집에서 슬쩍 표지갈이만 한 듯 천편일률적이다. 스포츠계의 숙원 사업인가 봤더니 실은 지역 건설 사업에 가까운 것인가 하면 아예 스포츠 정책 자체가 포함되지 않은 정당도 있다. 후보들 중에서 스포츠의 사회적 가치와 미래적 가치를 표명하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물론 현실 여건에서 스포츠가 국가 정책의 앞에 있기는 어렵다. 보다 더 총체적이고 보편적인 경제, 노동, 복지 등이 우선 중요하다. 거꾸로 말하면, 스포츠는 아직 보편의 의제가 아니며 어떤 점에서는 특정 직능 분야에 머물러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스포츠의 사회적 가치와 그 아름다운 영향력이 공기처럼 퍼질 텐데, 그에 대한 관점이나 정책이 태부족한 상황, 그것이 안타깝다. 

아직은 한가로운 소리지만, 대규모 전염병에 대비하여 사전에 방역체계를 구축했듯이, 코로나19 이후의 개인과 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위해 스포츠와 사회를 다양하게 재구성하고 연결하는 체계를 상상해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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