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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외환위기 당시에도 일부 부자들은 “이대로”를 외쳤다고 한다. 금리가 치솟으면서 이자 소득이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이다. 다수의 손실이 소수에게는 이익이 되곤 한다. 최근 현대차와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불법파견 판결을 보면서 다시 ‘이대로’가 떠올랐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월 취임사에서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이중구조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 전체 임금근로자의 3분의 1에 달하는 비정규직 문제를 두고서 어떻게 ‘국민 행복 시대’를 얘기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친기업 성향을 가진 정부의 경제 수장 발언으로는 이례적으로 비칠만도 하다.

하지만 정부가 어떤 식으로 비정규직 문제를 풀려 하는지는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현대차는 지난달 울산공장을 제외한 비정규직 노조와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근속을 일부 인정하는 방식으로 ‘채용’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집단적인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판결을 코앞에 둔 시점에 소송을 취하하는 조건의 합의였다. 선고를 앞둔 전략적 합의로 보였다. 아니나다를까 지난 18~19일 서울중앙지법은 “현대차 공장 내에서 적법한 도급은 성립할 수 없다”는 요지의 판결을 내놓았다. 현대차 입장에서는 ‘완패’했지만 사전 합의를 통해 그나마 영향을 줄인 셈이 됐다.

사내하청이란 방식의 비정규직이 양산된 것도 외환위기 이후부터다. 대기업들이 잇따라 넘어가는 공포 속에서 ‘기업 살리기’를 지상과제로 삼아 인건비를 절감하는 방편으로 비정규직이 이용됐다. 워낙 비상 상황이다보니 암묵적인 사회의 동의가 뒷받침됐다. 하지만 노동자가 가져가야 할 몫을 중간에 떼가는 형태는 본질적으로 불법이다. 이번 판결은 그런 원칙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비상 상황에서 확대된 비정규직 고용을 이제는 정규직으로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사회적 메시지를 던졌다.

오진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 (출처 : 경향DB)


“비정규직이 꼭 나쁜 건가요?” 한 대기업 직원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 그가 불쑥 내뱉은 말이다. 기업인들이 이래저래 비정규직 고용의 적법성을 주장하지만 결국 근저에는 그런 마음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정규직이 받는 차별과 경제적 고충을 불가피한 기업 경쟁력의 발판으로 보는 것이며, 그렇게 그동안 누려왔던 혜택을 놓기가 싫은 것이다. 하지만 무턱대고 예전처럼 버티기에는 법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렵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현대차처럼 ‘완패’를 피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계는 일부 전문직에 국한하고 있는 파견을 아예 전면 허용하자는 요구를 하고 있다.

정부의 시각도 비정규직 사용의 판을 유지하면서 격차를 줄이자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차 판결 직후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은 “기간제 법처럼 원·하청 간 상생발전 측면에서 봤을 때 이번 판결이 작은 것보다 큰 것을 잃게 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부의 비정규직 대책은 정규직과의 임금이나 처우 격차를 줄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정규직화는 정부 개입보다 노사 합의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서울중앙지법이 현대차와 기아차 사내하청을 불법파견으로 본 법리를 적용하면 대부분 업종에서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고용해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시 말해 판을 깨뜨리는 판결이다. 복잡한 비정규직 대책이 필요없는 셈이다.

기업 경쟁력이 곧 국가 경쟁력일 수는 없다. ‘국가는 국민’이고 국민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양질의 일자리다. 그래서 비정규직 고용은 나쁘다. 기업의 사내 유보금이 쌓여간다고 국민이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차별없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아야 국민 행복 시대 아니겠는가. ‘이대로’는 안된다.


박철응 정책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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