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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홍욱 정치부 기자 ahn@kyunghyang.com


 

지금이야 수억원대 금품수수 혐의로 구속된 몸이지만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전 차관은 이명박 정부 초기에 잘나갔다. ‘개국 공신’이던 그는 문화부 차관으로, 국무회의 결과를 브리핑하는 정부 대변인을 겸했다. 신 전 차관은 2008년 5월 “국무총리제는 독재시절에 (대통령이) 얼굴 마담을 시키기 위해, 책임으로부터 차단막을 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는 말을 했다. 당시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책임총리제 강화’를 얘기하자 “대통령제를 잘 모르고 하는 얘기”라면서 이렇게 일축했다.


일개 차관이 여당 대표의 제안을 단박에 뭉갰던 그 말은,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실인 듯하다. 적어도 이명박 정부가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국무총리 위상을 어떻게 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정부는 부처별 업무조정 등 국정 조정 기능을 총리실에서 청와대로 이관시켰다. 실제 총리가 국정 운영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며 추진한 일이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국가정책조정회의에서 모두발언하는 김황식 총리 (경향신문DB)



이 정부 첫 총리인 39대 한승수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일방적 국정 운영 속에 존재감 자체가 미약했다. 40대 정운찬 총리는 이 대통령 요구에 맞춰 ‘세종시 수정안’을 밀어붙이다 ‘세종시 총알받이’라는 오명을 쓰고 1년 만에 물러났다.


41대 김황식 총리에게도 아쉬운 대목이 많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국무회의에서 밀실 처리한 과정을 보면 총리의 역할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김 총리는 이 대통령이 해외 순방 중인 지난달 26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며 군사협정을 통과시켰다. 정부가 안보를 위해 체결이 중요하다던 한·일 군사협정을 비밀리에 추진한 과정은 문제다. 나아가 국무회의 안건을 사전 논의하는 차관회의를 건너뛰고 즉석 안건으로 올려 이 협정을 비밀리에 처리했다. 국무회의 처리 이후에도 알리지 않고 있다가 들통이 났다. 김 총리는 이를 방관했다. 당대 최고의 법률가라는 대법관에, 감사원장을 지낸 그의 이력을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협정 밀실 처리를 두고 청와대가 시켰느니, 외교통상부가 주도했느니 하는 책임 떠넘기기는 볼썽사납다. 사안의 심각성을 감안하면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기획관 사표로 끝날 일은 아니다. 이번 사태가 현재까지 홀로 총대를 멘 김태효 기획관이 직책상 상관인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외교부 장관을 뛰어넘어 주무른 것이라면 특히 더 그렇다. 상황이 이러한 데도 모른 척 한 발 떨어져 있는 그의 태도는 적절하지 않다. 그의 처신을 두고 ‘부작위(不作爲) 총리’라는 지적도 나온다.


비밀·졸속 처리에 대한 여론의 질타가 쏟아지자, 김 총리는 지난 6일 국회 개원에 맞춰 “주요 현안에 대한 정책 방향과 정부 입장을 충실히 설명해 오해를 푸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며 여론 무마에만 신경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정도로 매듭지을 일이 아닌 만큼 행정부를 총괄하는 그의 책임있는 입장 표명이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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