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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주 | 시인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들은 지루하고 답답했다. 시 자체를 감상하는 법을 몰랐으니 당연하다. 아니, 아무도 우리가 시를 통해 사물과 인간의 진실된 세계에 접근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니 교육과정에선 당연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교과서에 갇힌 시들은 물방울이 없는 조화 같았다. 모범답안을 찾아야 하는 입시문학으로서 그 시들은 영원히 시들지 못해서 병들어 있었다. 


도종환 시인 (경향신문DB)


 문학청년들은 ‘입시 서자’로 치부되기 십상이었다. “어떻게 이 시를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 앞에서 “이 시의 주제는 4번의 보기에 가깝다” 같은 ‘답’에 형광펜을 칠하다 보면 수업종이 치거나 시험지를 걷어갔다. 시는 함축과 상징이었지만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있어야만 밑줄을 그을만 했다. 비유는 우리가 모범답안으로 이해하는 범위 안에서만 점수로 인정되었다. 내 문학점수는 늘 참혹했다. 그러다가 나는 우연히 어머니의 책장 한 귀퉁이에서 도종환 시집 <접시꽃 당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시 중 하나인 ‘흔들리지 않으면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가 접혀 있는 페이지를 발견한다. 왜 이런 시는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지? 나는 입으로 소리 내어 그 시를 읽어 보았다.


시인이 고른 단어 속에는 세상의 작은 비밀들이 수런거리며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 시가 너무 가냘퍼서 이 세상과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조금씩 이 세상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언어들을 중얼거리며 습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 막막한 중얼거림이 아직도 시의 귀퉁이를 차지하는 중요한 질감이라는 것에 나는 동감을 표현하고 사는 편이다. 시는 소리 내어 읽어보는 중얼거림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왜 어떤 선생님들도 나에게 몰래 고백해 주지 않았을까? 


도종환 시의 교과서 삭제 파문이 일었다. 그 사이, 어릴 적 내가 읽은 도종환 시인의 시가 교과서에 실렸나 보다. 기사를 보면서 처음 드는 생각은 “이제 좀 읽을 만한 시가 교과서에 실리는구나. 다행이네”였다. 조금 있다가 드는 생각은 “여전히 그 시에서 모범답안 같은 주제를 학생들이 찾고 있다면 불행인데”였다. 근데 세간은 이 시의 교과서 삭제 여부를 놓고 논란이다. 굳이 플라톤의 유토피아 건설에서 내세운 시인 추방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시인과 정치는 애당초 친화력이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어떤 곳인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클래스를 지켜온 ‘에이스’를 만드는 과자회사인지, 어디서 제조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뻥튀기’를 만드는 구름회사인지 관심 없다. 시를 조금 그들보다 많이 아는 나로서 이 나라의 문학교육 균형에서 볼 때 도종환 시인의 시가 실리는 것 정도는 그들의 교육적 ‘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필요해 보인다. 


멕시코 문화부 장관을 했던 시인 옥타비오파스도, 프랑스 국무위원을 했던 시인 클로델도 그들의 취임식에서 자신의 시를 ‘우렁창창’ 낭독했다. 시인이 조금씩 사라지는 나라는 우울한 나라지만 시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나라는 불행한 나라라고, 그들은 대중에게 호소했다. 우주로 날아간 우주비행사들에게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에 도착했으니 이제 지상권을 포기하라는 것처럼 인권을 위해 싸우려면 시의 권리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는 너무 궤도를 이탈한 몽환발언 아닌가. 교육과정평가원 심사위원 여러분! 그대들도 읽고 나면 흔들리지 않을 수 없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시를 교과서에 넣어 주시길. 시인에게 가장 큰 상처는 자신의 시가 그 사회에서 실종되어 버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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