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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칼럼

[경향논단]박근혜 도그마

opinionX 2012. 7. 10. 12:00

전원책 | 변호사·자유기업원장


 

적기(赤旗)는 ‘혁명’의 상징이다. 프랑스혁명 직후 루이16세의 ‘반동’에 대항한 시민의 깃발이자 자코뱅 공포정치의 깃발이었다. 1848년 2월혁명 때에도 혁명세력인 소부르주아의 깃발이었다. 그 무렵 <공산당선언>을 썼던 마르크스는 2월혁명의 불길이 오스트리아와 독일로 번져가자 쾰른으로 돌아가 신(新)라인신문을 발간했다. 임금노동자 계층이 막 형성된 독일에서 공산주의를 선전할 목적에서였다. 신문사는 프로이센 수비대의 유치장 맞은편에 있었는데 식자공들은 의도적으로 붉은 자코뱅 모자를 쓰고 다녔다. 당국은 불온사상을 퍼뜨린다는 이유로 신문을 폐간하고 마르크스의 추방을 결정했다. 마르크스는 종간호를 빨간 잉크로 찍은 뒤 밴드가 연주하는 가운데 적기가 펄럭이는 신문사를 떠났다.


(경향신문DB)


 그 뒤로 붉은색은 공산당의 상징이었다. 1871년 파리코뮌 당시에도 ‘혁명’의 징표였다. 1917년 러시아혁명 당시엔 공산당의 적기와 아나키즘의 흑기(黑旗)가 서로 경쟁하면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4년 뒤 레닌의 적기가 승리하면서 붉은색은 푸른색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에 대한 ‘유일 좌파의 색깔이요, 체제 전복의 색깔이자, 계급론자들이 일컫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색깔’이 됐다. 구 소련의 국기가 붉은색이었고, 독일과 일본의 공산당 기관지 이름이 ‘적기’였으며, 중국의 국기가 ‘오성홍기(五星紅旗)’인 것이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추종하는 민주국가에서는 적기든 홍기든 내건 전례가 없다. 그런데 이 붉은색을 새누리당이 쓰고 있다. 한나라당은 ‘침대가 과학이다’라는 홍보전문가를 발탁하여 당명을 바꾸면서 당의 색깔을 버렸다. 명색이 보수세력을 대변하는 정당을 자임했던 정당이 어떤 명분도 없이 ‘자유’의 상징인 푸른 옷을 벗고 붉은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단풍이 든 것이다. 


당의 강령에 ‘보수’를 두니 마니 논란을 벌이면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전 세계에서 보수를 내건 정당이 없다는 흰소리였다. 쉽게 말해 당의 철학과 이념을, 당의 역사를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지자에게 보수정당이라고 말해왔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버린 것이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면 이념이든 역사든 색깔이든 다 버릴 수 있다는 또 다른 패권주의 같은 것이 작동했던 것인가. 


새누리당이 박근혜의 당이라는 건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다. 이 거함은 선장과 기관사, 갑판장, 조타수에다 주방장까지 전부 친박계가 장악했다. 정몽준·이재오·김문수가 있어봤자 그저 망망대해나 구경하는 승객일 뿐, 배의 진로에 대한 어떤 발언권도 없다. 이러니 이상돈 교수가 했던 말대로 박근혜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구색은 갖춰야 하니 경선이란 걸 하게 됐고, 캠프를 만들었고, 광장에서 출마선언을 했다. 그 현장인 영등포 광장에 선 박근혜의 붉은색 옷은 유난해 보였다. 아, 붉은색! 그녀는 그 옷을 입고 경제민주화와 일자리 그리고 복지를 말했다. 대기업 개혁을 말했고, 남북 간의 신뢰회복을 말했다. 그러나 ‘경제민주화’라는 정치적 구호 속에는 성장의 틀을 유지하면서 빈부격차를 해소하겠다는 구체적 정책이나 중산층을 복원하려는 어떤 고민의 흔적도 없었다. 교육이 최고의 성장정책이라고 했을 뿐 고등교육의 보편화 정책이 빚은 청년실업 문제에 대한 대책이라고는 없었다.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라는 황홀한 속삭임은 있었지만 복지 사각지대를 해소하려는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 야당의 정적들이 내놓은 무지개 같은 ‘꿈’과 똑같은 꿈들이었다. 


전부 다 듣기 좋은 거대담론들이었다. 그런 박근혜의 ‘꿈’이 쏟아질 때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TV 카메라는 머리 허연 청중이 열광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했다. 캠프의 좌장인 노정객이 바라던 젊은이들이 열광하는 모습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젖어 박근혜 도그마에 빠진 ‘신도’들만 보였다. 그녀의 추종자들은 5·16을 혁명이라고 부르고 유신 쿠데타를 구국의 결단으로 평가한다. 그 박정희의 후광에 둘러싸인 그녀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말했다. 내 귀에는 그건 국민의 꿈이 아니라 ‘박근혜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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