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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나도 겪을 수 있는 상황을 함께하는 거니까, 현장투쟁은 바로 내 일”


몇해 전 철수한 프랑스 대형마트 까르푸의 경영진이 한국 노동자들에게 했던 패악질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까르푸 자본은 왜 프랑스 노동자들에겐 그렇게 하지 못할까? 톨레랑스의 정신이 프랑스 안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일까? 자본의 무한탐욕이야 톨레랑스와도 무관한 것이고 이유는 단지 하나다. 연대의 힘. 프랑스에서 한국 노동자들에게 하듯 했다간 프랑스 노동자들이 모조리 들고일어날 테니. ‘연대의 여왕’ 루시아(사무직 노동자 박희경)를 만났다. 인터뷰는 대통령 선거 이틀 전에 있었다.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현대자동차 농성 천막을 찾은 ‘연대의 여왕’ 박희경씨가 농성 노동자들을 위한 음식과 음료를 들고 달려가고 있다. _ 홍도은 기자 hongdo@kyunghyang.com(출처 : 경향DB)



▲ ‘투쟁’이라는 말은 사람들이 두려워해

주장보다 마음으로 다가가는 게 우선


▲ 지금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 찾으며

늘 말해요 “내일은 내가 해고될지 몰라”


▲ 김여진·공지영 등 투쟁 알려줘 고맙지만

그분들은 딱 거기까지만 해줬으면


김규항=인테리어 회사 경리과장이면 늘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잖아요.


박희경=완전히 사무실 붙박이니까 연대 활동엔 불리하죠.(웃음) 일인시위 같은 거 할 때는 점심 안 먹고 뛰어갔다 오는 거죠.


김규항=언제부터 그렇게 연대활동을 하셨어요?


박희경=2008년 기륭전자 투쟁부터예요. 그때 현장에 처음 갔는데 천막 안에서 바짝 마른 여자 두 명이 하얀 소복을 입고 단식하고 있었어요. 그 모습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사람이 어떻게 저런 곳에서 지낼 수가 있지, 너무 말라서 내일이라도 죽을 것 같은데 어떡하지 막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음날부터 이 사람들이 살아있나 걱정되어서 가기 시작했어요. 회사가 한남동이었는데 가산동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간 거죠. 가서는 이런저런 일도 돕고 인터넷 카페 운영도 맡고.


김규항=그 일이 꼬리를 물게 된 거군요.


박희경=그곳에서 동희오토나 다른 투쟁현장 노동자들도 만났죠. 2010년에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저희 집 근처인 양재동 현대차 본사 앞에서 투쟁을 했어요. 전에는 스태프로만 참여했지만 그때는 처음으로 주체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죠. 문건도 쓰고 다른 곳들과 연대도 조직하고. 그 다음에는 발레오 동지들을 만나고, 유성기업 동지들을 만나고 죽 이어져왔네요.


김규항=연대라는 게 원래 꼬리에 꼬리를 물다가 니 문제 내 문제 구분이 없어지는 거죠.(웃음) 대학 때 운동권이었나요.


박희경=학생회 활동을 했었어요. 하지만 졸업하고 취직하고 10년은 운동과는 연을 끊고 살다시피 하다가 어느 날 ‘아 이렇게 살면 안되겠다’ 싶더라구요. 친한 친구가 민노당 당원이었는데 그러대요. 입당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웃음) 그래서 내가 후원금 내는 곳이 어떤 덴가 가봐야지 하고 갔다가 당원이 되었죠.


김규항=흔히 강남에 사는 자유주의자들을 강남좌파라고 합니다만, 루시아님이야말로 강남좌파군요. 직장도 강남이고 집도 강남인데 관심은 늘 투쟁 현장이니.


박희경=강남 아이로 자랐죠. 고등학교까지는 좀 공주처럼 컸구요.(웃음) 재수할 때 아빠가 돌아가시고 좀 달라졌죠. 어머니가 일하시다 지금은 제가 일하고 있구요.


김규항=‘연대의 여왕’이라는 별명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희경=명예롭죠. 그런데 동지들이 만날 그러고 놀리고 그러죠.(웃음)


김규항=우리 사회는 사회문제에 대한 연대도 유형이 딱 있잖아요. 사무직 노동자들은 시민운동이나 아름다운재단 같은 곳엔 연대해도 노동운동에 연대하는 경우는 드물죠, 그래서 루시아님을 좀 특이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겠어요.


박희경=주변 사람들하고 보면 많이 특이한 편이죠. 제가 요 몇 달은 회사 일이 너무 많아서 현장에 잘 못 갔더니 다들 그러는 거예요. 루시아가 회사원이 맞긴 맞구나.(웃음)


김규항=회사 동료들과 연대 활동에 대해 이야기도 하나요.


박희경=많이 하죠. 그런데 일단 ‘투쟁’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울산에 간다고 해요. 그럼 울산에 왜 가냐구, 그럼 거기 비정규직 싸움이 있다구, 사람이 철탑에 올라가서 농성하고 있다구. 그럼 ‘사람이 철탑에 올라가 있어요?’ 묻죠. 뉴스 같은 데서 보고 묻기도 하구요. 그럼 조금씩 설명을 해요. 조금씩 조금씩 빗물이 스며들듯이 소통한달까요.


김규항=반응이 어떤가요.


박희경=되게 순수하게 받아들여요. 어떡하냐구, 사람이 그래서 어떡하냐구. 단식한다던 아저씨 TV에서 봤는데 나이도 많던데 괜찮냐구 막 그러구요. 이번에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의 후원주점 티켓도 동료들이 많이 사주었어요.


김규항=평소에 루시아라는 사람에 대한 존중이 있는 거겠지요. 평소에 하는 짓이 곱지 않은데 그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 그러면 교회가 싫어지잖아요.(웃음) 정치적으로 옳은 이야기라는 것도 마찬가지죠.


박희경=안 그래도 노동운동 하면 빨강 띠 두르고 팔뚝질하는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거든요. 주장보다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해요. 그럼 평범한 사람들도 대부분 마음을 열고 들어요. 


김규항=평범한 사람들은 마음을 여는데 오히려 스스로 개혁적이라는 사람들, 정권교체에 몰두하는 운동권 출신들이 아집에 빠진 경우를 많이 봐요. 선과 정의를 독점한 오만한 태도랄까요. 소셜테이너라는 분들도 그런 경향이 있구요.


박희경=김여진씨나 공지영, 정혜신 같은 분들은 참 고맙죠. 그분들 덕에 한진(한진중공업) 투쟁이나 쌍차(쌍용자동차) 투쟁이 더 많이 알려졌구요. 고마운데 그분들은 딱 거기까지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말할 때는 절대로 현장을 언급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현장에서 자기의 정치적인 소신도 이야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지금 정리해고나 비정규 문제들이 사실 노무현 정권에서 이명박 정권으로 이어지는 문제들인데 현장에서 그렇게 좋은 일하고는 문재인 지지하고 찬조연설하면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거잖아요. 결국 현장을 이용하는 것밖에 안되잖아요. 


김규항=개인적으로는 좋은 분들이고 악의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자신의 행동이 갖는 사회적 맥락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하면 좋을 텐데요. 정혜신씨는 문재인 후보 찬조연설에서 쌍차 해고노동자 이야기를 많이 했다던데 정말 몰라서 그런 거라면 더 큰일이구요.


대선후보에게 외치는 쌍용차 노조원들의 외침 (출처: 경향DB)


박희경=쌍차 동지들 하고 며칠 전 이야기하면서 그랬어요. ‘이렇게 되면 쌍차 동지들이 전부 문재인을 지지하는 걸로 되어버린다.’ 투쟁은 위도 아래도 없이 한사람 한사람 동지들의 땀과 노력이 쌓여서 만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런데 투쟁이 승리를 한다고 해도 결국은 국회의원 누가 와서, 공지영이 와서, 김여진이 와서 이런 식으로밖에 보여지지 않는 거예요. 당사자들의 처절했던 하루하루가, 그 삶들이 완전히 묻혀 버린다는 게 저는 정말 화가 나요. 승리하고서도 이 동지들의 마음에 뭐가 남을까. 내가 싸워서 이겼구나, 또 이런 일이 생기면 또 일어나리라 이런 자신감이 생길까? 아니라는 거죠.


김규항=제가 경조사에 잘 안가는 편인데 막상 제가 상을 당해보니까 와주는 사람이 그렇게 고맙더군요. 어렵게 싸우다보면 와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당연히 고마울 수밖에 없죠. 그런데 그런 인지상정의 마음이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면, 현장의 주인공을 바꿔버리고 현장의 진실을 왜곡한다면 그건 연대가 아닐 겁니다.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지만 이런 고민과 체험을 통해 노동운동이 더 성숙해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박희경=그렇게 분별력이 생기고 좀더 성숙해져서도 변함없이 만나고 연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규항=오늘 투쟁 현장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투쟁 현장만 현장이라는 생각도 다시 생각할 문제지 싶어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사실은 다 현장이죠. 내가 저 사람들보다 고용안정성이 조금 높고 임금이 조금 많은 순간에 있다뿐이지 자본과 노동의 관계에서 보면 같잖아요. 나 역시 언제 그런 상황에 처할지도 모르는 거구요.


박희경=‘내가 지금 있는 곳’이 다 현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조금씩 조금씩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게 현장 활동이구요. 삼성이나 엘지 같은 대기업이라면 정치적 행동이나 활동의 제약이 많겠지만 어지간한 중소기업들은 생각보다 자유롭거든요. 할 수 있는 게 많아요. 연대하러 온 사무직 노동자들끼리 회사에서 동료들과 이렇게 한다 저렇게 이야기한다 그런 대화도 많이 하죠.


김규항=나는 현장에 있지 않다는 건 사실 착한 마음이잖아요. 나는 지금 투쟁현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보다 훨씬 편하게 지내고 있으니 죄스럽고 미안하다. 그런데 그 착한 마음이 대부분의 현장을 스스로 부인하고 삭제해버리는 거죠. 그러면 남는 건 간접적인 돕기 활동밖에 없어요. 후원금을 낸다거나 강연회 가고 책 읽고 하면서 자신의 급진성을 현실과 차단하죠.


박희경=저는 늘 그렇게 말해요. 내일 내가 해고될지도 몰라. 나 내일부터 회사 앞에서 출근투쟁할지도 몰라.(웃음) 농담에 가깝지만 제 지향과 제 현실을 생생하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거죠.


김규항=연대에 그렇게 적극적일 수 있었다는 건 성격적인 부분도 있었죠? 대개 사람들은 투쟁 현장에 처음 가면 어색하고 불편하거든요.


박희경=제가 사람을 워낙 좋아해요.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고 쉽게 친해지구요. 말씀대로 사람들이 투쟁현장에 처음 가면 쭈뼛쭈뼛하는데 저는 그냥 혼자 덜렁덜렁 가요. 동희오토 동지들이 그러더군요. 저기 멀리서 어떤 여자가 봉지에 뭐 주섬주섬 들고 온대요. 그렇게 와선 한바탕 떠들고 간대요. 그러면 기분이 안 좋다가도 기분이 나아지고 힘이 난대요.


김규항=처음부터 그랬어요?


박희경=거의 그랬죠. 사람들이 신기했대요. ‘저 사람은 성격이 정말로 밝구나’ 자기들끼리 그랬대요.(웃음) 금속노조나 이런 데서 온 활동가인 줄 알았다는 사람도 있구요.


김규항=보통 사람들이 투쟁현장에 좀더 편하게 연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격을 다 루시아 스타일로 고칠 수도 없고.(웃음)


박희경=불과 몇 달 전, 몇 해 전만 해도 나와 다를 바 없이 살던 사람들이라는 걸 기억하면 좋겠어요. 투쟁현장에 있는 동지들도 누구나 편하게 다가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해요. 가장 소박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선의가 편안하게 받아들여져야 해요. 갑자기 어려운 이야기를 해버리거나 다짜고짜 변혁이라든가 수준 높은 이야기들을 해버리면 불편할 수밖에 없죠.


김규항=유명인이 찾아오면 잘 대해주잖아요. 변명의 여지없이 고칠 부분입니다.(웃음)


박희경=유명인보다 같은 노동자가 왔을 때, 평범한 시민이 왔을 때 오히려 더 잘 대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김규항=더 맞고 더 멋진 거죠. 대선이 코앞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보적 정권교체’에 관심이 많은데 그분들이 생각하는 진보와 루시아님이 생각하는 진보는 뭐가 다른가요.


박희경=저는 진보이론을 많이 공부하거나 한 사람은 아니지만 진보의 기준은 분명히 알아요. 진보는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노동자들이 누군가에게 억압받지 않고 차별받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지금 말하는 진보적 정권교체는 그런 기준은 아니죠. 이미 충분히 안정되게 살아가면서 이명박이나 박근혜 반대하는 분들이 기준이니까요.


김규항=말씀대로 ‘진보의 기준이 누군가’가 빠져버리면 수구기득권 세력과 신흥기득권 세력의 정권 싸움밖에 안 되겠죠. ‘최저생계비가 만원도 안돼요?’ 반문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는 건 끔찍한 일이지만 ‘진보의 기준이 누군가’는 문재인이냐 박근혜냐 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나저나 인테리어 회사는 한겨울엔 덜 바쁘니 다시 연대의 여왕이 활약할 시기인가요?(웃음)


박희경=오랜만에 본 동지들이 그래요. 연애하냐구 남자 생겼냐구.(웃음)


김규항=남는 시간을 모조리 연대활동에 쓰는데 연애를 언제 해요.


박희경=그러게요. 제가 가끔 농담처럼 동지들한테 그래요. 비정규직 철폐되고 정리해고 없어지는 날 나도 결혼할 거라구, 나 시청 광장에서 결혼식할 거라구, 시청광장 미리 빌리자구 막 그러죠. 그럼 동지들이 ‘그럼 결혼 안 한다는 이야기네!’ 그러죠. 그럼 제가 그래요. 그게 바로 문제라구, 왜 우리가 이긴다는 생각을 못하냐구, 난 내년에 결혼할지도 모른다구!(웃음)


김규항=주례를 세우려면 노동자 시장부터 당선시켜야겠군요.(웃음)


박희경=동지들은 저한테 늘 고맙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은 제가 더 고마워요. 힘이 빠지거나 기분 안 좋은 일 있다가도 동지들 만나서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싸우고 그러면 힘이 나고 사는 기쁨이 생기거든요. 


김규항=불쌍한 사람을 돕고 난 다음의 보람하고는 다른 기쁨이겠죠. 


박희경=나하고 무관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동정하고 시혜를 베푸는 게 아니잖아요. 같은 상황을, 나도 겪을 수 있는 상황을 같이 함께 하는 거니까요. 그건 바로 내 일인 거죠. 


김규항=기억나는 순간 하나만 들려주세요.


박희경=너무 많은데요.(웃음) 동희오토 동지들이 양재동에서 싸울 때 일인데요. 동지들이 어느 날 제 머리에 투쟁 띠를 묶어 줬어요. 그렇게 가슴이 뛰고 눈물이 나더라구요. 그리고 명예조합원이라고 하면서 투쟁 조끼를 주었어요. 제가 받은 가장 소중한 선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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