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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예술가에게 공공성이란 국가가 아니라 소수 권리 옹호하는 것”


봉건시대의 미술가들이 귀족의 주문을 받아 살았듯 오늘 미술가들은 자본의 주문을 받아 살아간다. 주문을 받지 못하는 99%의 미술가들은 주문을 받는 1%를 바라보며 살아간다. 


미술가들이 고루 살면서 미술이 사람들에게 삶의 밥이 될 순 없을까. 미술이 공공성을 회복하는 것과 창의적 개인들이 살아 숨쉬는 것을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미술이 ‘현실 복무’의 이름으로 정치나 이론에 복무하는 게 아니라 창의성과 예술적 모험을 배가하면서 사회 변화의 주체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공무원 큐레이터’ 김준기(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의 고민은 끝이 없다.


 

김준기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이 지난 11일 ‘주차콘’으로 서울 청계광장에 설치된 클래스 올덴버그의 ‘스프링’을 풍자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_ 김문석 기자 kmseok@kyunghyang.com (출처 :경향DB)




▲ “대추리·용산 등 살아있는 현장 떠나면

결국 제도 안에서 스스로 침잠하게 돼


▲ 자본의 선택 못 받은 99%의 미술가들

전시장과 시장만 바라볼 게 아니라

새로운 장, 즉 현장을 발견하고 들어가야


▲ 관 주도 공공미술은 갈등 덮으려고만 해

북한처럼 자기 실험도 도전도 못하죠


▲ 예술활동 왕성한 곳 지적 성숙도 높아

청계천 ‘스프링’ 맥락없이 명품 박은 격


김규항 = ‘스프링’은 아무리 봐도 청계천에는 생뚱맞아요. 


김준기 = ‘세계적인 명품 맥락 없이 갖다 박기’가 이명박 시장의 특기였죠.(웃음)


김규항 = 작은 사물을 엄청 크게 만드는 올덴버그의 작업 방식이 그의 마음을 맥락 없이 사로잡은 거죠.(웃음) 공공미술에 대한 관심이 각별하신데요.


김준기 = 10여년 전 가나아트 공공미술팀장으로 일할 때인데 어느 날 보니까 제가 미술판에서 개혁의 대상이 되어 있더라고요. 가나아트가 홈플러스 조형물을 싹쓸이하고 있을 때였어요. 구본주나 이불 같은 작가의 작품들도 넣고 하면서 제 나름대로는 의미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공공미술이 건축물 미술장식품인가’라는 질문과 비판이 나오고 있었던 거죠. 


김규항 = 선택의 기로에 섰군요.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완전히 넘어가느냐, 냉정한 성찰로 자신을 복원하느냐.


김준기 = 몇해 전만 해도 사회변혁을 꿈꾸던 청년이었는데 말입니다. ‘공공성’에 대한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했고 20대의 삶이 복원되는 계기가 되었죠. 그때 제게 들어온 게 1980년대 현장미술이었어요. 1980년대는 ‘전시장 미술’이라는 말을 따로 써야 할 정도로 현장미술이 성행했잖아요. 미술 제도 안쪽과 바깥쪽을 연결하는 실천을 21세기에 어떻게 접목할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석사논문도 그걸 썼죠. 민중미술 후반 작가를 중심으로 하는 ‘건너간다’전을 진행한 것도 그 즈음이고요. 


김규항 = 1980년대 현장미술은 요즘 공공미술에서 말하는 ‘커뮤니티 아트’의 중요한 사례인데요. 21세기 들어 대추리나 용산에서 현장미술, 이른바 ‘파견미술’ 활동도 그렇죠. 대추리는 초기에 직접 참여하셨죠?


김준기 = 2003년께 정태춘 선생 등 예술가들과 기획에 참여했는데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계속하진 못했습니다. 2006년에 다시 가서 보니 엄청난 일들이 벌어져 있었어요. ‘대추리 현장예술 아카이브’라는 걸 만들었죠. 예술가란 살아있는 현장과 만나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제도 안에서 침잠할 수밖에 없다는 걸 다시 한번 배우는 순간이었죠. 


14일 평택 대추리에서 미국 대륙을 형상화한 철골구조물 너머로 보이는 농협 창고. (출처 : 경향DB)


김규항 = 연구자나 이론가에게 그런 현장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건 굉장한 일이죠. 공공성은 언제나 대결합니다. 대추리에서도 ‘국가 안보를 위해 주민이 양보해야 한다’는 공공성과 ‘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지 말라, 주민이 국가다’라는 공공성의 대결이었죠. 


김준기 = 예술가에게 공공성이란 하나라는 것, 국가가 아니라 소수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이라는 걸 뚜렷하게 확인하는 기회였죠. 


김규항 = 예술과 주민, 예술과 인민의 삶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끝이 없는데요. 


김준기 = 가령 오지호나 허백련을 비롯한 근대의 대가들이 짱짱하게 견인해온 광주와 전혀 그렇지 못했던 부산의 20세기 미술역사와 문화 상황은 확연히 달라요. 19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적 활동이 완성한 지역의 지적 성숙도는 확연히 다르죠. 예술이 한 공동체를 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기제인 건 분명합니다.


김규항 =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누구나 공감하기에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어요. 근대 이후 사회와 예술가의 정체성의 변화라든가, 구체적인 맥락을 짚어나가는 논의는 부족한 편입니다.


김준기 = 근대에 들어서면서 예술가들, 미술가들은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죠. 전에는 주문에 의해 생산했다면 이제 생산의 주인이 되었죠.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제도화된 미술시장에 자신을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죠. 


김규항 = 실제적으로는 똑같은 상황이죠. 미술가들은 주문이 들어오는 예술가로 픽업되어야 살 수 있고, 픽업된 미술가들은 또 탈락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김준기 = 99는 못 들어가고 1만 들어가는 구조죠. 미술가들은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구조에 끊임없이 머리를 처박고 있는 거죠. 


김규항 = 말씀대로 대다수의 예술가들이 참여할 방법은 없는 구조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할 거예요. 얼핏 생각하면 공공성이라는 게 사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니까 미술가들의 살림에 도움이 되는 게 아닐 것 같은데 오히려 공공성의 추구만이 미술가들이 고루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아닐까요. 


김준기 = 물론입니다. 근래 좌판에서 ‘현장의 재구성’ 이야기를 자주 하시던데 미술가들에게 필요한 것도 그겁니다. 전시장과 시장만 바라보는 99%에 머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장, 현장을 발견하고 들어가야 하는 거죠. 현장은 끝없이 많죠. 미술가에겐 마을이라는 것부터가 현장이고요. 요즘 부각되는 협동조합도 예술가들의 창작과 생활에 중요한 방식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의 예술가들 단체라는 건 그들끼리의 이익추구에 머물렀기 때문에 시민사회와 호흡할 수 없었죠.


김규항 = 픽업된 미술가들은 참여하지도 않고요.


김준기 = 핵심을 아프게 찌르시는군요.(웃음) 진짜 잘나가는 예술가들은 99%의 공간에 참여하지 않죠. 


김규항 = 협동조합은 미덕과 가능성은 존중합니다만, 근래 이명박 정권이나 재벌까지 협동조합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인양 몰아가는 건 의심스러운 데가 있죠. 협동조합은 자본주의가 파괴한 상호부조의 정신과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운동이어야 하는데 분별없이 휩쓸려가면 오히려 자본주의로 심화된 모순과 갈등을 은폐하는 도구로 사용될 여지가 있죠. 예술가들의 창작이나 생활과 관련해서 매우 의미있는 틀일 수 있는데, 잘 만들어가야죠.


김준기 = 프랑스에는 ‘새로운 주문자’ 프로젝트가 있어요. 전근대 시대의 주문 생산방식이 근대의 자율 결정으로 바꿨다가 다시 탈근대 시대에 와서 ‘우리 주문받겠다. 마을공동체로부터 주문받겠다’로 가는 거죠.


김규항 = 주문을 받는가 안 받는가가 아니라 주문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의 본질이 드러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군요. 근래 우리 사회에서 ‘진보시민들’이 빠진 함정과 같은 맥락인 듯해요. 자유가 있는가 없는가만 파고들 게 아니라 누구의 자유냐를 생각할 때입니다. 공공미술은 실제 진행에서 재원 마련이 쉽지 않다보니 관의 지원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공공미술이 국가나 자본 체제에 포섭되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기도 하죠. 


김준기 = 2006년에 문화부가 처음으로 국가단위의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벌였어요. 공공미술추진위도 만들고 아트인시티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시작했죠. 제가 팀장으로 나름대로 열심히 뛰었는데요. 그런데 이게 관의 돈으로 하다보니까 지적하신 대로 첨예한 지점은 비껴나가고 갈등의 상황을 드러내거나 문제시하기보다는 덮어놓고 치유하겠다 이렇게 가게 되더군요. 지금도 사업이 유지되고 있는데 공공미술의 방향과는 다르게 가고 있죠. 


부산 수정동 공공미술 작업 심점환 작가의 물통 그림. (출처 :경향DB)


김규항 = 관의 지원이라는 게 사실 시민들의 돈이잖아요. 공공성이 훼손되지 않으려면, 시민들이 자신들의 돈을 자신들의 문화생활을 위해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준기 = 시민사회의 자율결정에 의해 공공의 재원을 조성하고 합의를 모아내면서 시민사회의 문화의식을 표출해내야겠죠. 이젠 예술 소비, 향유도 향유자들이 적극적인 자기결정력을 가지고 예술가들과 방향성을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예술가들도 향유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확인하고요.


김규항 = 그러려면 일단 시민들의 삶에 미술이 밥처럼 들어와야 하는데요. 없어도 무방한 거라면 불만도 없고 요구도 없으니까요.


김준기 = 어릴 때 배를 곯았던 세대가 아직 사회의 주역이라 미술의 밥에 배고픔을 느끼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저만 해도 형제와 가족들에게 미술품 사라는 권유를 잘 못하겠거든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에게 미술을 접하게 하는 게 참 중요하죠. 


김규항 = 막연하게 느껴지지만 한 사회를 놓고 보면 사실 가장 빠르고 분명한 방법이죠.


김준기 = 가령 대전시립미술관에선 청소년 도슨트를 진행해 봤어요. 중학교 여학생 둘이 전시에 대해 설명 듣고 공부를 한 다음에 도슨트로서 시민 관객들과 전시투어를 하는 거죠. 팩트는 분명히 하되 자기 나름의 이야기도 할 수 있게 했어요. 도슨트 학생이나 시민들이나 정말 재미있어 했어요. 


김규항 = 대전시립의 명물이 되겠는데요. 학교 미술교육은 어떻게 가야 할까요.


김준기 = 가장 중요한 게 실기 위주에서 감상교육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거죠. 물론 어릴 때는 연필로 물감으로 많이 그려야죠. 그런데 좀 자라면 체계적인 감상교육이 필요한데 그게 거의 안되고 있죠.


김규항 = 그런 단절이 시민들의 일상에서 미술과의 단절을 만들어내는 셈이군요. 근래 유럽 미술 쪽은 액티비즘이 대세입니다. 2008년 공황 이후 나타난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상인데요. 희한하게도 근래 한국 미술계는 치유나 힐링이 대세였어요. 


김준기 = 요즘 ‘스스로 선언하는 자의 것’이라는 액티비즘의 명제를 자주 떠올리곤 해요. 적극적 사회적 실천과 미술적 실천을 결합한 액티비스트로서 가치지향을 가진 작가와 비슷한 활동을 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작가는 전혀 다르거든요. 이념이라는 게 예술가의 자율적 활동이나 창작을 가로막는 틀로 작용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김규항 = 과거의 급진주의 미술들이 보여주었듯, ‘예술이 현실에 복무한다’는 명제는 실제로는 예술이 정치와 이론에 복무하는 상황으로 귀결되곤 하죠. 


김준기 = 북한 미술이 순도 100% 공공미술이거든요.(웃음) 그러나 북한엔 예술이 없죠. 자기 실험도 없고 예술적 도전도 없으니까요. 액티비즘은 예술가가 현실과 결합하면서도 예술가로서 정체성을 확장하고 열어나가는 데 꼭 필요한 지침이죠.


김규항 = 미술잡지 기자, 미술관 큐레이터, 비엔날레 전시기획자 등 미술판에서 거의 모든 일들을 해오셨어요. 근래 들어선 부산시립미술관 큐레이터에 이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일하고 있는데요. 공무원 생활이 어떤가요.(웃음)


김준기 =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자기 실천을 하는 중요한 채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립이나 시립미술관이 참 중요한 공간이죠. 시민들이 미술을 향유하는 공간이니까요. 


김규항 = 미술이든 음악이든 춤이든 시민들, ‘업계에 속하지 않는 관객’이 결국 미래를 결정하죠. 지난번 ‘여기 사람이 있다’전은 좋은 작품들이 많아서 저도 갔었는데요. ‘분단미술’전 같은 것도 유별난 학예실장이 아니었다면 어려웠겠죠. 


김준기 = 분단미술전 때는 국정원 조사도 받았죠. ‘공무원 큐레이터’라서 치러야 하는 불편함이죠.(웃음) 그러나 시민들이 그런 작품들을 접하면서 한편으로 충격도 받고 불편해도 하면서 문화적으로 나아가는 걸 보거든요. 저도 공부가 많이 됩니다. 


김규항 = 사비나 미술관과의 부당해고 소송은 꽤 알려진 일인데, 최근 잘 마무리되었다고요. 사비나 관장은 미술계의 실력자이기도 하거니와 선생은 근래 공무원 신분이었으니 어려움이 많았겠어요. 


김준기 = 온갖 회유와 협박, 이야기하자면 참 길죠. 며칠 전 해고기간 임금이 제 통장에 입금되었는데 재판 기간 7년에 변호사 비용 등을 생각하면 돈의 의미보다는 한국 사회에서 큐레이터의 인권, 노동자로서 큐레이터의 권리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김준기 케이스가 ‘큐레이터 개 취급하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를 가진다면 충분히 만족합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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