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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규항


ㆍ“대선은 386 재집권 실패일 뿐인데 왜들 멘붕이란 건지 모르겠어”


김규항 = 필모그라피(영화이력)가 많습니다. 주요한 장편만으로도 <어머니>(2012), <당신과 나의 전쟁>(2010), <샘터분식>(2009), <필승 2―연영석>(2008), <우리 모두가 구본주다>(2005)….


태준식 = ‘독립영화계의 남기남’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웃음)


김규항 = 진행 중인 작품도 있죠? 평택에 자주 가시는 것 같던데요.


태준식 = <당신과 나의 전쟁> 그 후 이야기를 찍고 있어요. 큰 싸움 이후, 큰 비극을 겪은 후에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라는 주제를 좀 길게 보면서 찍고 있습니다. 하나 더 있는데 조중동에 관한 다큐입니다. 어차피 대선 이후에 완성할 생각이라 여유있게 작업해왔습니다.



고 이소선 여사의 이야기를 다룬 <어머니>, 쌍용차 파업을 담은 <당신과 나의 전쟁> 등을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 태준식씨가 자신의 영화철학을 이야기하고 있다. _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출처 : 경향DB)



▲ 대선 결과가 어떻든 상관없이

대다수가 어떤 희망을 갖고 사나

뭘 발견해야 할까 등을 그리려 해


▲ 박근혜 당선 후 잇단 노동자 자살 보고

현실의 실체 드러내려 노력해왔는데

대체 난 뭘 한 걸까 회의감 들기도


김규항 = 대선 결과로 멘붕(극심한 정신적 혼돈 상태)이라고들 하는데 작품엔 어떤 관련이 있나요.


태준식 = 솔직히 말해서, 저는 대선 실패라는 게 386이 정권 탈환에 실패한 것뿐인데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과 무슨 큰 상관이 있는지 왜들 멘붕이라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대선 결과가 무엇이든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희망을 갖고 살아가나, 뭘 발견해야 할까 하는 것들을 그리려 합니다.


김규항 = ‘386의 재집권’에 진보정치와 민주노동운동 역량을 거의 다 쏟아부었기 때문에 그 실패가 모두의 실패가 되어버리는 슬픈 상황이죠. 사실 문재인의 낙선에 멘붕일 건 없죠. 수출 위주에 높은 금융개방도에 대기업 집중인 현재의 한국 경제가 기댈 데는 결국 노동계급의 희생밖에 없는데, 박근혜든 문재인이든 그 구조 안에 존재하니까요. 문재인의 인품을 말하는데 고 노무현 대통령도 개인적 인품은 그만한 사람 없었죠.


태준식 = 저는 다큐를 하는 사람이니까 두 후보의 TV 광고를 흥미롭게 봤는데 게임이 안되더라고요. 문재인 쪽 광고는 감동, 뜨거움, 현장의 분위기 같은 386의 정서로 가득했어요. 박근혜는 완전히 달랐어요. 어머니의 심정, 19일이면 달라질 거야, 심지어 자신을 부정적으로 그린 ‘여의도 텔레토비’ 캐릭터까지 끌어들였어요. 그런데 낙선 후에 나온 문재인 헌정 광고도 똑같더군요. ‘386들이 한풀이 한번 찐하게 하는구나’ 싶었어요.


김규항 = 386세대의 일원으로서 이래저래 참 민망해요. 386 주류는 김대중, 노무현 정권 거치면서 또 하나의 기득권 세력이 되었으니 수구 기득권 세력과 정권 다툼을 벌이는 거야 당연하죠. 하지만 그걸 정의와 진보의 전쟁인 양 대중을 미혹하는 건 추했어요. 어쨌거나 대선은 끝났고 앞으로 5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중요하죠. 5년을 또 386의 재집권에 올인하면 정말 끝장이고요. 그나저나 대선을 그렇게 한칼로 정리하시니 요즘 분위기에선 이채롭군요.(웃음)


태준식 = 대학 3학년 때부터 20대 내내 노동자뉴스단(노뉴단)에서 활동하다가 30대 들어 회사에 몇 년 다녔어요. 노뉴단에 있을 때는 노동자가 해방되는 좋은 세상이 와야 할 텐데 하는 큰 덩어리의 생각을 했다면 회사에 다닐 때는 노동자의 삶이란 게 이런 거구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가는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 같아요. 노무현 정권이 한참 노동운동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사회적으로 퍼트릴 때인데 저는 오히려 그 반대로 가더라고요.


김규항 = 20대에 활동하던 청년이 30대에 회사 다니면 급진성도 옅어지게 마련인데요. ‘세상이 간단한 게 아니구나’ ‘내가 좀 어렸구나’ 하면서요.


태준식 = 저는 이론이나 이념보다는 생활인으로 살면서 평범해 보이지만 자기 삶을 잘살아가는 사람들, 지혜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배우면서 좌파적 관점이 더 자연스러워진 것 같아요.


김규항 = 작가로서 좌파적 관점도 더 자연스러워졌음이 작품에 드러납니다. 사실 사람의 신념이 오래 가는 힘이 교조나 이론이라는 시각은 사실과 많이 다르죠. 그건 청년 시절 한때에나 가능한 것이고 삶에서 얻은 지혜가 신념을 지키는 힘이 되는 경우가 많죠. 주위를 둘러봐도 그래요. 주류 386들이 대중을 부추기고 지도하려 든다면 이쪽은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살피는 태도가 많아요. 지금 급진적인 경향의 청년들을 보면 어떻습니까.


태준식 = 좋죠. 그런데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대학생들이 <당신과 나의 전쟁> GV(guest visit)에 저를 부르면 대부분 거절했어요. 내가 그 작품 이후 쌍차노동자들의 싸움에 늘 함께해온 것도 아니고, 작품 하나 만들었다고 해서 내가 주인공이라도 되는 양 나서는 건 불편한 일이다, 나 말고 당사자들 쌍차노동자들을 불러서 직접 만나고 이야기를 듣는 게 좋겠다면서요.


김규항 = 영화를 통해 현실을 소비하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인가요?


태준식 = 이명박 이후에 ‘양심적인 시민들’이 많이 생겨난 것 같아요. 그분들이 노동 문제나 투쟁 현장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고 제 작품이나 이런 다큐들이 그분들에게 조금씩 도움도 되었고요. 그런데 그분들이 노동문제에 진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무엇보다 자신들을 스스로 조직하고 싸우고 해야 하는데요. 그게 아니라 영화를 보고 울음이나 분노나 이런 것들로 쫙 한번 소비해버리는 경향이 있어요.


김규항 = 노동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건 무엇보다 내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인데요. <어머니>는 그런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었어요. 촬영에만 2년2개월이 걸렸는데 또렷한 기획을 가지고 시작했나요. 하면서 구성이 된 건가요.


태준식 = 이소선 어머니를 만나기 전에는 한 인물의 역사, 남한 사회의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운동에 대한 큰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생각도 했는데 만나면서는 어머니라는 개인에 집중하게 되었어요. 만날수록 어머니의 매력에 빠져들었죠.(웃음) 저걸 잘 살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 오래 만나야지, 방송처럼 한두 달 찍고 만드는 게 아니라 오래 길게 가야지 했죠.


김규항 = 그분의 매력에 십분 동감합니다.(웃음) 작업이 인생 공부가 되었군요. 치유의 느낌도 있고요.


태준식 = <당신과 나의 전쟁>을 만들면서 너무나 힘들었어요. 편집을 하면서도 너무 슬프고 분이 터져서 마지막 시퀀스를 2주 넘게 넘어가질 못할 정도였어요. 어머니를 만나면서 다 위로받고 치유할 수 있었죠. 어머니는 끊임없이 당신이 경험한 일들을 들려주셨어요.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떻게 고문받았고 또 사람들에게 어떻게 멸시당했는지…. 저는 대체 그런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이런 당당함은 대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을까 궁금해졌죠. 그분에게서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가져야 할 태도가 뭔가, 진실을 위해 굽히지 않는 용기란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었어요.


김규항 = 일각에서 ‘어머니’라는 제목에 대해 문제 제기가 있었죠.


태준식 = 모성의 굴레가 아니냐는 이야기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까지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건 속상하더라고요. 지금까지 이래야 하는 건가 싶어서요. 작품을 안 보고 그런 말씀 하는 경우도 많이 보여서 작품을 일단 보시고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었고요. 사실 경순 감독이나 김일란 감독 같은 페미니스트 감독들에게 자문과 동의를 얻은 제목이었어요.


김규항 = 전 그 이야기 들었을 때 원론적으로는 의미가 있는데 이소선 어머니를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구나 싶었어요. 모성의 굴레를 온전히 벗어난 분이셨죠. 어떤 어머니보다 어머니셨지만 세상 어떤 아버지보다 아버지셨으니까요. <어머니>는 형식적으로 평범한 듯하면서 평범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주제의 다큐를 만들다보면 형식 면에서 고민이 많을 것 같아요. 자칫 두 측면이 서로 갉아먹기 십상이고요.


태준식 = 형식주의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형식 자체만 고민하는 작가가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걸맞은 다양한 형식적 완성도를 추구하는 거죠. <어머니>나 <샘터분식> 같은 건 정말 제 마음대로 만들었어요. <샘터분식>은 작품 나왔을 때 주변에서 왜 이렇게 만들었냐고 다들 놀라고 그랬죠.(웃음) 하지만 저는 형식적 시도야말로 독립 예술가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횡포라고 생각해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그래픽 (출처 :경향DB)


김규항 = 당연히 누려야 할 횡포죠. 그걸 누리려고 상업영화 안 하는 건데요. 다큐처럼 사람을 직접적으로 불편하게 하는 예술도 없죠. 진실을 목도함으로써 갖는 관객의 불편함에 대해선 어떤가요.


태준식 = 작품을 마칠 때마다 내가 제대로 했나 되새겨보게 되는데 그건 곧 제대로 불편하게 만들었나 되새겨보는 것이기도 하죠. 사실 최근엔 회의가 들기도 했어요. 단지 박근혜가 되었다고 해서 다섯명의 노동자가 세상을 떠나다니 이게 뭔가, 나름대로 현실의 실체를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찍고 작업해왔는데 대체 난 뭘 한 걸까.


김규항 = 관련해서 저는 시스템을 그리는 다큐가 나오면 좋겠다, 사회의 전체 얼개를 드러내는 다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어지간한 건 다 386의 전략에 종속되어 버리니까요. 2008년 이후에 외국에선 그런 게 좀 나온 것도 같은데요. 


태준식 = <샘터분식>을 끝내고 금융자본주의에 대해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누구나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세상이고 그 이자의 변화에 따라 사람이 죽기도 살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그 부분에 대한 관심이 적잖아요. 저에게도 남의 일 아니고요. 그래서 기획을 진행했는데 <당신과 나의 전쟁>을 만들어야 했고 또 다른 현안에 매달리면서 못했죠. 지금 하고 있는 조중동 작업도 조중동을 욕하고 비웃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인가, 그 이면에 자본이 있고 조중동 또한 그에 자유롭지 못한 시스템이 있다는 걸 그리려고 해요. 제목이 <슬기로운 해법>이에요.(웃음)


김규항 = <당신과 나의 전쟁>도 나지막하게 시스템을 이야기하고 있죠. 노무현 대통령 죽음으로 노란 물결이 온 나라를 휩쓸면서 쌍용차 파업 노동자들은 더 고립되고 그 분위기를 이용해 진압이 강행되는 과정, 사람들이 진정으로 자기 삶을 생각했다면 노란 물결이 아니라 쌍용차 정문으로 달려갔어야 했다는 이야기….


태준식 = 사회는 가면 갈수록 투명해지는데 사람들이 그걸 제대로 보긴 더 어려워져왔어요. 386 자유주의 세력이 사람들과 사회의 그 중간에 서서 거대한 막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죠. 사회를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다큐가 나오길 기대하고, 저뿐 아니라 그런 조짐은 많이 보입니다. 한국의 독립 다큐가 김동원 감독의 <상계동 올림픽>으로 시작되었는데 ‘착한 카메라’라고 할까요, 그런 작품도 계속 나와야 하지만 다른 형식과 다른 관점을 가진 작품도 많이 나올 겁니다, 이젠.


강동원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상계동 올림픽' (출처 : 경향DB)


김규항 = 반이명박, 반박근혜도 있고 반자본, 반지배계급도 있으면 좋겠죠. 여태까지 충분치 않았던 건 사회 인식의 문제뿐 아니라 여건의 문제도 있지요?


태준식 = 미국만 해도 이자율을 결정하는 회의 같은 데 카메라가 들어가거든요. 스테이크 썰면서 전 지구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자들을 영상으로 보면 느끼는 게 있을 수밖에 없는데 한국에선 어려운 이야기죠. 또 일개 인물이나 주제가 아니라 시스템을 제대로 드러내는 작품을 하려면 제작비가 많이 필요하고요.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저는 그걸 극복하는 사례를 만들어보려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김규항 = 기대가 됩니다. 스테이크 썰면서 지구를 쥐락펴락하는 자들 이야기를 들으니 몇 달 전에 본 역대 경제 관료들 모임이 생각나는군요. 그 자체로 그냥 세상의 진실이더군요. 경제를 주물러온 관료들의 면면엔 여도 야도 없는 거죠. 그들이 한동아리로 어우러지는 풍경을 다큐에 담는다면 백마디의 말보다 났겠구나 싶었어요.


태준식 = 카메라가 들어가긴 어렵겠지만.(웃음) 여건 이야기를 좀 했지만 그걸 핑계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여건이 나빠서 더 작업이 역동적이고 재미있는 면도 있고요.


김규항 = 인터뷰 초입에 대선을 한칼로 정리하셨으니(웃음) 이제 대선 이후 우리가 뭘 해야 할지도 말씀해주시죠.


태준식 = 저는 그럴 주제가 못되는데…. ‘좌판’에 나올 만한 사람인가 싶어서 많이 망설였거든요.


김규항 = ‘좌판’에 모시는 분들의 공통점입니다.(웃음) 


태준식 = 그런가요.(웃음) 나오면서 급진주의자란 뭘까, 좌파란 뭐하는 사람일까, 곰곰이 다시 생각해봤어요. 결국 ‘끊임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구나 싶어요. 박근혜가 되든 문재인이 되든, 아니 노동자 후보인 김소연이 되었다 해도 좌파는 끊임없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이 아닐까, 그렇게 세상의 문제와 진실을 사람들에게 알려내는 사람이 아닐까. 결국 좌파의 숙제는 얼마나 잘 시끄럽게 떠드는가겠죠. 아름다운 시끄러움, 감동적인 시끄러움….


‘대선은 386의 재집권 실패일 뿐인데 왜 우리가 멘붕에 빠져야 하는가’라는 태준식의 말이 선뜻 받아들여질 사람은 오히려 많지 않을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작품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우선 두 개를 권한다. <당신과 나의 전쟁>과 <어머니>. 오늘 현실의 얼개가 담겨 있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는 비결이 담겨 있다. 작품은 어떤 결론도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결론을 갖든 멘붕에서 빠져나갈 첫걸음은 될 것이다. 그 또한 다큐멘터리의 힘이다. DVD 문의 : 한국독립영화협회 (02-334-3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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