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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말로는 못할 것이 없다. “우리 국문과 교수들이 소설을 안 써서 그렇지, 쓰면 연수씨보다 훨씬 잘 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소설가 김연수에게 어느 국문학과 교수가 했다는 말이다. 인터뷰집에서 김연수는 써야만 쓰는 것이라고 했다.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은 간절함인데, 그 간절함(은) 반복적인 행동으로 나오는 일이겠죠.” 그리고 “재능은 큰 도움이 안되는 것 같아요. 우리가 서른 살까지 산다면 결정적이겠지만, 대부분은 오래 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무의미해지죠”라고 했다.

상상력조차도 꾸준함에서 나온다고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말했다. 1982년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달리고 있는 그이다. “그저 묵묵히 시간을 들여 뛰어간다. 장편소설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계속 이어가는 것 리듬을 끊지 않는 것. 이것이 장기적인 작업에서는 중요하다.” 무라카미는 에세이를 쓰는 이유도 비슷하게 설명한다. “나는 글자로 써보지 않으면 어떤 사물에 대해 제대로 생각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누구라도 반복하지 않으면 프로가 되지 못한다.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자가 22일 오전 서울 서초동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다. 김 후보자 임명동의안은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명한지 31일만에 국회를 통과했다. 연합뉴스

김명수 대법원장은 후보자로 발표되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저는 31년5개월 동안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호흡하며 재판만 해온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어떤 모습인지 이번에 보여드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두 가지 속내를 전달하고 싶었을 테다. 법원행정처 경험이 없다는 비판에 대한 답변, 평생을 재판만 해온 95% 판사들에 대한 응원이다. 이 말에는 사실 이유가 있다. 재판을 잘하려면 재판을 오래 해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가 법원에서는 부정되어 왔기 때문이다.

김명수 후보자가 발표되자 행정처에서 일한 전·현직 판사들은 노골적이고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기자를 만나서도 스스럼없이 후보자의 경력을 깔보았고, 사고를 치고 법복을 벗은 처지에 사법부의 미래를 개탄했다. “(청와대가) 사법부를 행정조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가장 혁명적인 조치.” “도대체 법원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행정처 출신들은 스스로도 이렇게 본다. “우리 행정처 판사들이 재판을 안 해서 그렇지, 하면 당신들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정처 출신 판사 가운데 재판을 잘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령 강일원 헌법재판관의 재판은 폭포가 떨어지듯 정확하고 신속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이 무난하게 끝난 것도 그의 공이다. 또 다른 행정처 출신인 특허법원 김환수 수석부장판사 재판은 사람의 마음부터 어루만진다. 영어로 심리를 주재하는 실력파이지만 당사자의 긴 얘기를 마음으로 듣는 겸손한 판사다. 무람하지만 내 주례 선생인 김앤장 변호사도 행정처 출신의 그런 판사였다.

하지만 몇몇 좋은 결과가 있다고 해서, 일반적인 현상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재판을 오래 하지 않았어도 깔끔하게 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다. 오히려 이 판사들이 재판에만 집중했다면 더 좋은 재판을 했을 테다. 사법시험에 붙은 판사들의 능력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재판을 오래 한 사람이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도 사법관료들은 “하급심을 아무리 오래 해도 대법원 재판은 다르다. 미국에서도 곧바로 대법원장이 되지만 종신제라 다르다”며 버틴다. 

일본을 대표하는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가 걸작 <후가쿠 36경(富嶽三十六景)>을 내놓은 게 일흔이 넘어서다. 여든아홉에 임종을 앞두고 그는 “하늘이 내게 수명을 다섯 해 더 준다면, 진정한 화공이 될 수 있을 텐데”라고 했다. 유럽까지 뒤흔든 천하의 호쿠사이도 이렇다. 물감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재판은 죽을 때까지 해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25일 업무를 시작한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주권자인 국민이 여섯 해를 주었다. 이 시간 동안 약속을 지켜야 한다.

31년 동안 재판만 한 사람의 실력을 보여줄 때다.

<사회부 |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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