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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10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긴 추석 연휴, 영화관을 가장 뜨겁게 달궜던 영화는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청이 인조의 친명배금정책에 불만을 품고 공격해온 병자호란(1636년)이 배경이다. 강화도로 채 피란 가지 못한 인조는 혹한의 남한산성에서 버티지만 결국 47일 만에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는다. 영화는 항복할 것이냐, 항전할 것이냐를 놓고 설전을 벌이는 주화파 최명길과 척화파 김상헌을 주목한다.

영화 <남한산성> 스틸 이미지

<남한산성>은 마음 편한 영화가 아니다. 승리의 역사가 아니라 패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139분간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객석에 앉은 관객들의 마음은 다들 비슷했을 것이다. 선조들의 무능함이 안타깝다가도 화가 나고, 그랬다가 한탄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저렇게 시대 흐름을 못 읽었느냐고. 저무는 명과 떠오르는 청이라면 당연히 청을 따랐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그깟 명분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김상헌의 척화를 이해는 하지만, 최명길의 화친이 더 현명했다고.

이미 역사의 진행 결과를 알고 있는 후대로서는 이렇게 말하기 쉽다. 하지만 당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똑같은 판단을 할 수 있었을까. 결과를 보고 앞선 선택을 평가하는 것을 행동경제학에서는 ‘사후확신편향’이라고 부른다. 이른바 ‘후견지명(後見之明)’이다.

그냥 역사 영화라면 킬링타임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지금 한반도 상황이 381년 전과 빼박도록 닮았기 때문이다. 당시가 명이 저물고, 청이 떠오르는 명청 교체기였다면 지금은 미국이 비틀거리고 중국이 무섭게 부상하는 미·중 교체기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00주년인 2045년 즈음에는 중국이 미국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이 많이 나와 있다. 지금 20대가 40대 후반이 될 즈음이면 중국이 패권국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선택이 쉽지 않다. 한국에 미국은 6·25전쟁 때 같이 피를 흘린 혈맹이다. 명분과 의리로 보자면 미국을 외면하기 힘들다. 언론과 사상, 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미국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서구적 합리성은 중국을 앞선다. 중국의 공산당 전체주의는 앞선 모델이 아니다. 명과의 의리를 앞세우며 오랑캐국 청을 받들 수 없다고 하던 척화론자들의 고민과 절묘하게 들어맞는다.

문제는 선택의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한반도 상황이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중국이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의 한반도 배치에 반발하고 있다. 한·미는 북한 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방어시스템이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은 미국이 중국 본토를 들여다보기 위해 사드를 설치했다고 믿는다. 중국의 경제보복은 이미 노골화됐다. 롯데가 쫓겨나오고 현대차도 어렵다. 중국인 관광객의 한국 방문은 끊긴 지 오래다. 미래권력 중국을 달래야 하는데, 그렇다고 혈맹 미국의 요구를 뿌리치기도 힘들다. 한·미동맹은 현실이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나.

다시 17세기 초로 되돌아가 보자. 역사가들은 명과 후금(청) 사이에서 실용외교를 편 광해군을 주목한다. 광해군은 명이 후금을 치기 위한 파병을 요청하자 고민 끝에 응한다. 하지만 조선군은 후금과의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조선의 부득이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설명해 양해를 얻어낸다.

사드 문제도 큰 틀에서는 성격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경제와 안보, 모두 중요한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사드 배치에 응하면서도 중국을 자극하지 않는 실용적 묘책이 필요하다.

어렵더라도 균형외교를 펴면서 미·중 양국을 달래고 설득하고, 양해를 구해야 한다. 자칫 어느 한쪽 편을 과도하게 드는 순간 또 다른 국난에 봉착할 수 있다. 국난은 총칼이 아닌 경제적 수단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울 수 있다. 문재인 정부의 현명한 외교정책을 기대한다.

<경제부 | 박병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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