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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3월 한국 강릉

10일 오후 1시15분. 셔틀버스에서 내렸다. 30명은 돼보이는 사람들이 강릉올림픽파크로 향하는 건널목에 서 있었다. 고요했다. 둘러보았다. 고요하지 않았다. 수어(手語)가 오가고 있었다. 평창 동계패럴림픽을 보러 온 청각장애인들이었다. 사람이 모이면 소리가 나야 한다는 고정관념. 부끄러워서 길을 재촉했다.

오후 3시30분. 강릉하키센터 관중석이 가득 찼다. 입장객 6058명. 파라아이스하키(para ice hockey·장애인 아이스하키의 공식 명칭) 예선 한·일전에 나설 양국 대표선수들이 입장했다. 차례로 호명될 때마다 큰 박수가 터졌다. ‘빙판 위의 메시’로 불리는 세계적 골잡이 정승환(32)이 소개되자 함성은 더 커졌다.

휘슬이 울렸다. 1피리어드는 잘 풀리지 않았다. “대~한민국” 구호가 나왔지만 ‘의무방어’처럼 들렸다. 2피리어드. 장동신(42)의 첫 골이 터졌다.

강릉하키센터에서 10일 열린 2018평창동계패럴림픽 아이스하키 한국과 일본의 예선경기에서 한일 양국의 관중들이 관중석을 가득 메운 채 응원전을 펼치고 있다. 강릉 _ 강윤중 기자

관중석 온도가 급상승했다. 사내 입장권 추첨에서 당첨돼 왔다는 옆자리의 두 여성도 신나서 태극기를 흔들었다. “오기 전에 걱정했다. (너무 힘들게 경기하면) 눈물나는 거 아닐까 하고…. 걱정 괜히 했다. 스피디하고 긴박감 넘친다.”(김슬기씨·32) “몰입도 최고다. 앞으로 방송에서도 중계를 해줬으면 좋겠다.”(서모씨·32)

 3피리어드. 정승환이 단독으로 치고 들어가 두 번째 골을 넣었다. 관중석에선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대표팀이 파도타기 응원을 보는 건 처음일 터다. 조영재(33)·이해만(46)의 추가 골이 이어졌다. 일본이 한 골 만회했지만 게임 오버. 4-1 승리 후 인사하는 서광석 감독(41)의 얼굴이 환했다.

비장애인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출신인 서 감독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장애인이 된 후 10여년간 투병하다 작고했다. 모교인 경복고 아이스하키팀을 지도하던 서 감독이 파라아이스하키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다. 패럴림픽 개막 전(6일)과 예선전 2연승 후(11일) 두 차례 서 감독과 전화 통화를 했다.

- 선수들에게 아이스하키의 의미가 각별할 것 같다.

“비장애인팀도 지도해봤지만 파라아이스하키 선수들은 간절함이 더하다. 대표팀에는 사고로 장애인이 된 중도장애인이 많은데, 이들은 선뜻 밖에 나서지 못했다. 밖에서 생활할 때는 생각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경기장에선 다르다.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 퍽을 오른쪽으로 보내길 원하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보내길 원하면 왼쪽으로 보낼 수 있다.”

- 선수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국가대표 17명 중 강원도청 소속 13명을 제외하고 4명은 직업이 따로 있다. 이 선수들은 주말에 하루이틀 클럽팀에서 훈련하는 게 전부다. 비장애인 아이스하키는 실업팀이 꽤 있는데, 파라아이스하키는 강원도청 한 팀뿐이다. 대표로 소집되면 훈련수당이 나오기는 한다. 패럴림픽은 1년씩 훈련하니 괜찮지만, 다른 대회는 훈련 일수가 적어 수당이 적다. 정말 좋아해도 선뜻 나서기 쉽지 않다. ‘국가대표가 됐으니 휴직계 내겠다’고 직장에 말하기도 어렵다. 실업팀이 늘었으면 한다.”

- 4강 진출을 확정했다. 연장에서 극적으로 승리한 체코전이 특히 화제다.

“체코전에서 조금 긴장하긴 했는데,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대표팀에 운동을 오래 하고 나이 많은 선수들이 여럿이다. 주장 한민수 선수(48)는 패럴림픽 출전이 세 번째다. 이번 기회가 마지막이라는 간절함이 크다.”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의 한 장면. 태흥영화사 제공

■ 2012년 4월 노르웨이 하마르

 한국 아이스슬레지하키(파라아이스하키의 옛 명칭)대표팀이 20시간의 비행 끝에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리는 노르웨이 하마르에 도착한다. 관중석에는 ‘대한민국 선수단의 선전을 기원합니다’라고 적힌 플래카드만 덩그러니 펼쳐져 있다. 응원단은 없다. 격렬한 경기 중간 휴식시간에 물 따라주는 사람도 없다. 은메달을 따고 개선해도 공항엔 가족뿐이다. 지난 7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가 보여주는 파라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6년 전 모습이다.

영화는 하마르 대회에서 준우승하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하게 좇아간다. 미화도, 과장도 없다. 비장애인 여자친구 부모의 반대에 부딪힌 유만균 선수(44)는 “솔직히 나도 나중에 딸이 장애인 (신랑감) 데려오면 안 좋아할 것 같다”고 한다. 29세 때 패러글라이딩을 하다 추락사고로 장애인이 된 이종경 선수(45)는 “저 위(하늘나라) 올라가면 말할 수 있어요. 정말 행복했다고. 당신들은 한 가지 인생만 살았지만 저는 두 가지 인생(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살아봤다고.”

3년간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며 촬영한 김경만 감독을 인터뷰했다.

- 선수들의 밝은 에너지가 인상적이다.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과거형으로 물었다. 사고 전, 다리 있을 때… 이런 답이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지금이 제일 좋다고 했다. 비장애인들은 행복을 위에서부터 시작하니까, 자꾸 밑으로 떨어진다. 이 선수들은 불행의 밑바닥까지 가봤다. 그래선지 위로 올라가는 일밖에 안 남은 것 같다. 만약에 ‘행복감수성’이라는 단어가 있다면, 이들은 행복감수성이 강한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행복하다고 한다.”

- 여자들은 ‘남자들은 왜 우리를 동료로 대하는 게 어려울까’ 생각한다. 장애인도 비장애인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맞다. 너무 친절하지도 말고 똑같이 대하라는 말을 들었는데, 함께 지내보고야 알게 됐다. 장애인들의 장애는 모두 다르다. 계단을 못 올라가거나, 높은 데 있는 물건을 잡기 어렵거나, 앞이 안 보이거나…. 그런데 장애인이면 모든 걸 도와주려고 한다. 무릎이 아픈 사람은 무릎과 관련된 것만 도와주면 된다. 저는 선수들과 가까워진 뒤에는 촬영 장비도 들어달라고 했다. 제 팔힘이 더 약하니까…. 어려서부터 함께 자라면 경험이 쌓인다. 옆에 장애인이 있으면 바로 이해된다. 우리나라에선 어렵다. 교육이 분리되고, 직장에서도 장애인을 만나기 힘들고, 집 근처에 장애인시설이 들어오는 것도 반대한다. 이번 패럴림픽도 방송 중계가 너무 적다. 대한민국 국가대표 경기인데 재활운동으로 여기는 것 같다.”

- 영화에 나온 선수 대부분이 이번 올림픽에도 출전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응원을 들어보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 마음껏 즐기라고 말하고 싶다.”

■ 다시, 2018년 3월 한국

“다리가 없는 건 최악이다. 학교 가는 30분의 길은 지옥 같았고, 매일 피투성이가 된 내 다리는 후시딘 연고가 마를 날이 없었다. 남들은 내 걸음걸이를 보고 비웃기도 하고 흉내내며 놀리기도 했다. 그런 이들과 싸우는 수가 늘어갔고, 그런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는 어디론가 숨어야만 했다. 대학에 입학해 아이스슬레지하키를 시작하기까지 도전이라는 것을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불행했던 아이! 그 한 번의 용기있는 시작이 지금의 내가 되었다.”

10일 일본전과 11일 체코전에서 모두 3골을 넣은 정승환이 패럴림픽 개막을 앞두고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그는 다섯 살 때 집 근처 공사장에서 놀다 오른쪽 다리가 쇠파이프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결국 다리 일부를 잃고 의족을 차게 됐다. 고통스러운 유소년 시절을 보내다 대학에 들어간 뒤 아이스하키를 시작했다. 167㎝, 53㎏의 작은 체구를 강점으로 만들었다. 몸을 키우는 대신 속도를 높여 상대 수비를 가볍게 제친다. ‘로켓맨’ ‘세계에서 가장 빠른 아이스하키선수’로 불리는 이유다.

“국제대회에서 외국인들이 정 선수를 보면 난리가 난다. 인간이 아니라며 감탄한다. 방금 이쪽에 있었는데, 어느새 저쪽에 가 있으니까.”(김경만 감독)

정승환은 경향신문에 보낸 페이스북 메시지에서 “언젠가 은퇴하게 되면 장애인 유소년팀을 가르치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이 그러했듯이 아이스하키를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우리는 썰매를 탄다>가 개봉한 7일 낮. 서울 용산의 한 멀티플렉스 극장에 갔다. 156석 규모 상영관이 텅 비어 있었다. 영화를 보러온 관객은 나뿐이었다.

축제는 짧다. 열광과 함성으로 가득 찼던 강릉하키센터는 다시 고요해질 것이다. 그래도 파라아이스하키 국가대표 17인의 삶은 계속 시끌벅적하기를 바란다. 박진감 넘치는 그들의 경기를 TV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1박2일>이나 <런닝맨>에 출연하고, 평창올림픽 여자 컬링 대표 ‘팀 킴’처럼 광고도 찍었으면 좋겠다. 정승환은 패럴림픽 홍보 영상에서 “가장 힘든 건 무관심”이라고 했다.


파라 아이스하키

아이스 슬레지하키(Ice Sledge hockey)로 불리다 2016년 11월 명칭이 바뀌었다. 하지장애가 있는 선수들이 스케이트 대신 썰매를 타고 경기를 펼친다. 선수들이 쓰는 두 개의 스틱 양 끝에는 썰매 추진력을 얻기 위한 스파이크와 퍽을 치는 데 쓰는 블레이드(날)가 달려 있다. 한 경기는 15분씩 3피리어드로 구성되며 필요시 연장전과 슛아웃(승부샷)이 치러진다. 정규 피리어드 사이에는 15분간 휴식한다. 동계패럴림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으로 꼽힌다.

<김민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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