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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클럽은 책으로 이어진 가족…매달 즐거운 소풍 가는 경험”

정완근씨(37)에게 책은 ‘독약’에 가까웠다. 잘 봐줘야 ‘냄비 받침대’였다. 2016년 12월 지인의 ‘유혹’에 빠져 강원도에 여행 갔다가 인생이 바뀌었다. 북클럽의 이효석 문학기행이었다. 요리 잘하는 정씨는 ‘수발이나 들어주자’는 생각에 따라갔는데 얼떨결에 회원이 됐다(문제의 지인 정은주씨는 “일종의 강제가입이었다”고 털어놨다). 처음에는 억지로 읽었다. 어느 순간 책을 좋아하게 됐다. 2017년 한 해 동안 읽은 책이 30권을 넘겼다. 정은주씨는 “정완근씨 지인이 ‘완근이가 매일 책을 끼고 다닌다. 도대체 완근이한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더라”며 웃었다.

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 책과 저작권의 날’. 올해는 1993년 이후 25년 만에 선포된 ‘책의해’다. 책의해 조직위원회는 ‘함께 읽는 2018 책의해-무슨 책 읽어?’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성인 10명 중 4명이 한 해 동안 책 한 권도 안 읽는 나라(2017 국민독서실태조사)에서 함께 책을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지난 17일 경기 안산의 동네책방에서 정은주·정완근씨가 ‘애정해’ 마지 않는 ‘토요미스터리북클럽’을 만났다.

지난 17일 경기 안산 초지동의 동네책방 ‘토닥토닥괜찮아’에서 만난 토요미스터리북클럽 회원들은 웃음이 많았다. 이들은 “독서모임을 하면 책도 만나고 친구도 만난다. 외로운 분들은 꼭 북클럽에 참여해보시라”고 권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 ‘토요미스터리북클럽’ 탐사기

경기 안산지역을 중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모였다. 회장 이남식씨(54)는 반월공단의 자동차부품업체, 정완근씨는 인테리어업체에서 근무한다. 김방원씨(51)는 대구의 제조업체에서 일한다. 정은주씨(45)와 이옥선씨(31)는 도서관 사서다. 대학 교직원(김명기·47)과 다큐멘터리 감독(김수목·40)도 있다.

출발은 볼링동호회였다. 현 회원 7명 중 4명이 함께 볼링을 즐겼다. 2008년 어느 날,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 <연을 쫓는 아이들>을 함께 읽게 됐다. 풍성한 대화가 오갔다. 신선했다. 한 달에 한 권 정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회원들이 가진 책을 돌려 읽었다. 주제를 정하지 않다보니 추천자 취향에 따라 오락가락하는 문제가 생겼다. “외국 도서관의 독서동아리 실태를 조사해봤어요. 확실한 정체성을 가져야 모임이 오래가겠더라고요”(정은주). 4년 전쯤 미스터리 장르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장르 특성상 집중하기 좋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북클럽 이름도 미스터리를 읽는다는 점과,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책을 함께 읽는 행위 자체가 ‘미스터리(mystery·불가사의)’라는 데 착안해 정했다. 물론 미스터리만 읽지는 않는다. 틈틈이 한강의 <채식주의자>, 현기영의 <순이 삼촌> 같은 작품도 읽었다.

함께 읽기의 즐거움을 물었다. “혼자 읽을 때는 읽고 나면 덮어버리죠. 며칠만 지나도 ‘내가 뭘 읽었지?’ 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가벼운 책, 시간 때우기용 책을 보게 되는 측면도 있고요. 함께 이야기할 만한 책을 선택해 조금은 힘들게 읽고 대화를 나누면 즐거움이 더 큽니다”(김명기). “혼자서는 절대 안 읽을 책, 평생 한 번도 만나기 힘든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겨요. 같은 책을 읽고 이렇게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느낄 때가 많아요”(정은주).

때로는 의무감도 힘이 된다. “특별한 독서가가 아닌 한, 혼자서 시간 내 독서하기 쉽지 않죠. 처음 북클럽 시작했을 때는 안 읽고 가기도 했는데, 체제를 갖추면서 안 읽고 오면 벌금 1만원씩 내게 됐어요. 그때부터 악착같이 읽었죠(웃음). 출근시간보다 회사에 일찍 나와 1시간~1시간 반 정도 읽어요. 동료들이 ‘박사 되려고 그래?’ 하지요”(이남식). “주로 그림책이나 그림책 다룬 이론서를 많이 봤고, 여행에세이를 즐겼어요. 사실 추리소설은 별로 안 좋아했는데…. 여기 와서 읽으며 새로운 재미를 알게 됐지요. 함께 읽으면 책 읽는 범위가 넓어집니다”(이옥선).

혼자 읽고 나면 덮어버리기 일쑤
여럿이 모이니 책읽기에 푹 빠져
생일파티 마다하고 참석 열혈팬도

토요미스터리북클럽은 매달 마지막 토요일 오후 7시에 모인다. 10년을 꾸준히 이어온 비결은 ‘사람’이다. 정완근씨는 술과 친구를 좋아하는 쾌활한 성격이다. 처음에 독서모임 한다고 얘기하자 주변에서 “네가?” 하는 반응이 나왔다고 한다. 책 읽기에 푹 빠진 뒤엔 생일날에도 파티 열어주겠다는 지인들을 ‘뿌리치고’ 북클럽을 택했다. &lt;오리엔트 특급살인&gt;을 읽은 뒤 해물탕으로 직접 생일상을 차려 회원들을 감동시켰다. 이옥선씨는 “사람들이 책을 안 읽는 건 책에 대한 좋은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전 북클럽을 통해 매달 즐거운 소풍 가는 경험을 한다”고 말했다. 정은주씨는 “우리는 ‘책으로 이어진 가족’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 ‘느티나무 그늘’ 탐사기

독서모임 ‘느티나무 그늘’ 회원들이 지난 19일 서울 충정로의 한 카페에 모였다. 각자 좋아하는 책을 들어보이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옛 성공회대 노동대학)를 거친 사람들이 만든 북클럽이다. 2015년 8월부터 서른두 차례 만났다. 처음에는 역사 관련 서적을 주로 읽었다. 강만길의 <고쳐 쓴 한국근대사>, 서중석의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임영태의 <인류이야기-근대의 세계> 등이다. 이후 소설 등 다른 장르로도 독서 목록을 넓혔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 황석영의 <객지>,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 등을 읽었다. 올해 들어서는 철학과 자본론을 주제로 12개월치 리스트를 미리 짜놓았다.

단체 메신저 방에 모이는 회원은 17명이다. 모임 때마다 10명 안팎이 참석한다. 지난 19일 서울 충정로의 한 카페에서 이들을 만났다. IT 교육기관 근무(신상명·53),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활동가(강인수·49), 전직 기업체 중국지사장(하수연·58), 출판사 대표(김수현), ‘노동 방출자’(이상필·63) 등 다양하다. 이날 처음 참석했다는 윤성노씨(37)는 서울 행당동에서 세입자로 살다 강제철거를 당했다. 지금은 주거 문제 활동가이자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중·고생들에게 진로 교육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꿈을 찾으라고 하면서 정작 저는 정체돼 있더라고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면 2~3개월씩 연체를 해요. 혼자서는 안되겠다 마음먹고 모임에 참여하게 됐어요.”

무역업을 했던 양모씨는 자본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에 관심이 많다. 철학 중심의 2018년도 커리큘럼을 만든 주역이다. 병원에 근무하는 배형길씨(46)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집에서도 독서를 해 두 아들을 놀라게 한다. ‘우리 아빠가 달라졌어요’의 생생한 사례다.

“책 읽기만 목적 두면 모임이 딱딱
여행 등 재미 더하면 오래 이어져”

사회복지사 백미숙씨(48)는 원래 다독가였다가 한때 책을 놓다시피 했다. 느티나무 그늘에 참여하며 다시 책을 잡았다. 이제는 틈나는 대로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논다’. 백씨는 “여러 독서모임을 해봤는데, 책 읽는다는 목적에만 집중하면 모임이 딱딱해지고 오래 못 가더라. 인간적 유대가 필요하고, 여행을 가는 등 파생되는 재미도 있으면 좋다”고 말했다.

■ 지속가능한 북클럽 만들기 5계명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있다. 토요미스터리북클럽과 느티나무 그늘 회원들에게 ‘멀리, 함께’ 갈 수 있는 비결을 들어봤다. 지속가능한 북클럽 만들기 5계명이다.

■ 가깝고 편안한 사람들과 시작하라

낯선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할 경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이 생긴다. 부담 없이 편안하게 대화하는 즐거움이 있어야 모임에 오고 싶어진다.

■ 반드시 고상한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진지한 책을 읽고 심각한 토론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라. 책을 읽으면 현실적 도움이 돼야 한다는 생각도 금물이다. 함께 모여 수다 떨 수 있는 가벼운 책부터 잡아도 된다. 추리소설이든 무협지든 만화든 함께 읽는 즐거움을 맛보는 게 먼저다.

■ 모두가 완독하고 오지 않아도 된다

회원 전원이 책을 다 읽고 참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라. 읽고 오지 않았다고, 꺼낼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다. 서로에게 너그러워져야 북클럽이 오래 지속될 수 있다.

■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라

독서토론을 하다보면 정치관이나 종교관 때문에 갈등을 빚는 경우가 생긴다. 타인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임을 명심하라.

■ 처음부터 책 읽는 일에만 초점을 맞추지 마라

초기에 독서와 토론에만 집중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 작고 개성있는 동네 책방들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곳으로 나들이하는 일부터 시작해도 된다. 책을 먼저 읽고, 그 책을 토대로 만든 영화를 함께 보는 등 새로운 즐거움을 만들어가면 금상첨화다.

<김민아 논설위원 ma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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