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으면/ 아무도 없는 산비탈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누워 곡기를 끊겠다고 너는 말했지/ 나라도 곁에 없으면/ 당장 일어나 산으로 떠날 것처럼/ 두 손에 심장을 꺼내 쥔 사람처럼/ 취해 말했지/ 나는 너무 놀라 번개같이,/ 번개같이 사랑을 발명해야만 했네.”

봄밤에 글들을 뒤적이다 아름다운 시를 한 편 읽었다. 이영광 시인의 ‘사랑의 발명’. 장면을 그려보다 문득 오래된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토요일 오후, 친구 어머니를 뵈러 보육원 후원모임에 찾아간 데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대학원 시절 초반이었고 지금 같은 봄이었다.

낯선 분위기에 이제나 저제나 모임 마치기만 기다리던 중, 뒤편에 계시던 어느 수녀님께서 나를 가리키며 기도를 좀 해주고 싶은데 괜찮겠는지 물으셨다. 그곳 원장님 말씀이, 그 수녀님은 치유의 은사를 받은 분이니 학생은 행운이라 했다. 은사가 무슨 의미인지는 몰랐으나 실제 등에 따스한 손이 얹히자 뜨거운 것이 심장에서 쿨렁하는 느낌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뭔가 받긴 한 듯했다.

학교로 돌아와 조교실에 있는데 밤늦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열어보니 선배가 서 계셨다. 내게 독어 기초를 가르쳐주고 라틴어를 하나하나 짚으며 알려주신 분. 반가운 마음에 “선배님” 하며 옷자락을 잡았는데, 뜻밖에 선배는 취해 계셨다. 물 한잔 내어달라 하셔서 뜨거운 박하차를 끓이고 서랍에서 비스킷도 꺼내었다. 그리고 마주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박사논문 심사를 앞두고 여러 정황들로 힘들어하심을 어깨너머로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직접 말씀하시니 마음이 몹시 아팠다. 까맣게 어린 후배에게 내면을 내보이며 어떤 심경일지, 아는 체 역성들면 자존심 상해할 것 같고 힘내시라 하는 것도 건방질 듯해서 단어를 고르다 “이 비스킷도 하나 드세요”라고 말해버렸다. 바보, 바보.

그날 밤 집으로 향하던 버스에서 나는 ‘오늘 수녀님 통해 받은 게 정말 은총이면요. 그거 선배님 몫으로 주세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요’ 신에게 빌었다. 저런 언어도 기도라 불릴 수 있다면, 열아홉의 성탄 때 ‘대학 붙여주셔서 감사해요’ 이후 처음 드린 기도였다.

거기서 이어지는 장면들이, 그렇지만 내내 훈훈하지는 않았다. 선배는 기본문헌을 숙지하며 어학원부터 등록하라 조언하셨지만 ‘포스트-’ 이론에 흥분한 나는 새로운, 더 새로운 문헌부터 읽고 싶었다. 수업시간에 칭찬받고 좋아했던 날에는 문장에 멋 부리지 말라는 충고를 받았다. 난 혼란스러웠고, 이내 서운했고 결국 반발했다. 어느 시점부턴가 선배는 인사를 받지 않았고, 몇 번 그런 후로 나 역시 고개를 숙이며 피했다. 다시 인사하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 흘러서였다.

이 이야기가 위의 시와 대체 어떻게 연결되는지, 여기까지 보신 분들이 의아해하실 듯하다. 오래전 그때 사랑을 발명했다고, 그건 숭고한 형제애였노라고 감히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사랑을 알지 못하며, 일방적인 선망과 거기서 파생된 ‘자격요건을 갖지 못한 자’의 연민이 이제껏 가져본 감정의 전부니까. 더욱이 당시 난 치유의 힘을 진지하게 믿었던 것도 아니었다. 뭔가 얻은 것 같으니 그거라도 꺼내주고픈 간절함을 기도말로 옮겨보았을 따름이다. 심지어 그 감정은 칭찬에 대한 갈망과 인정욕구 앞에서 지속가능하지조차 않았다. 그럼에도 “살다가 살아보다가 더는 못 살” 것 같아 보여 “너무 놀라 번개같이” 기도를 흉내내어본 기억은, 그리고 내가 그랬듯 누군가도 그렇게 하리라는 상상은, 불가해한 위안을 준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시를 신이 없기 때문에 그 대신 한 인간이 다른 인간 곁에 있겠다고 결심하는 이야기로 읽었다 했다. “무정한 신 아래에서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어떤 순간들의 원형”으로 말이다. 무신론자가 아닌 나는 이 시가 채우지 못할 각자의 결핍을 지닌 유한한 인간이 그럼에도 다른 인간 곁을 맴도는 순간을 포착하였다고 보았다. 사랑할 줄도 모르면서 당장 내 앞의 사람에게 좋은 것을 내어주고픈 소망들의 원형. 그렇게 읽었고, 그게 좋았고, 그래서 글을 썼다.

<이소영 | 제주대 교수·사회교육과>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